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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이야기

경희궁과 주변 역사 탐방(4)

by 애바다
서궐도 (훼손 전)
경희궁지

강북삼성의료원 내에 위치한 경교장에서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동하였다. 한양 5대 궁궐(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중 아직 가 보지 못했던 마지막 궁, 경희궁을 탐방한다. 오늘(2023.08.13)의 하이라이트중 하나다. 운 좋게도 숭정문에서 경희궁 해설가분을 만나 다른 탐방객 세분과 합세하였다. 끝까지 친절하고도 열정적으로 해설하셨다.

붉은 선내가 복원 예정 경희궁터(출처 매일경제) / 표지판

한때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 재건을 위하여 경희궁내 건물들을 대거 해체하여 옮겨 갔다. 그 후 일제는 통감부의 자산이 된 경희궁을 처절하게 유린하여 궁장(담장)을 헐고, 기존 부지의 절반을 매각하였다. 더욱이 정문이었던 흥화문을 해체하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옮겨가는 만행을 저질렸다. 궁내에 일본 중학교를 설치하기도 했다. 결국 터만 남은 버려진, 사라진 궁궐이 되었다.

경희궁내 배치도 / 흥화문

1980년 9월에 경희궁터를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고, 수차례의 조사를 거쳐 복구를 시작하였다. 1987년에는 흥화문을, 1991년에는 숭정전을, 자정전과 회랑은 1998년에, 태령전과 그 일곽은 2000년에 각각 경희궁내에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위치에 이미 다른 고층 건물(구세군 회관)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위치를 조정하여 근처에 복구를 하거나(흥화문 경우), 이미 동국대에 이전했던 원 건물이 워낙 낡아 회수를 포기하고 원래의 건축물에 가깝게 복제 건축(숭정전)을 해야 했다.


오늘날도 예산 부족으로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무료입장이다.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출입을 하여 쉬어 갈 수 있는 넓은 공원 같은 분위기였다. 본원인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관리한다고 하나, 궐내 청소를 국내 모 대기업이 지원하는 등 힘에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화재위험 요소는 없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관계 정부 당국은 나머지 미복구 건물들을 세우고 관리를 잘하여 미래세대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희궁 전각 (흥화문,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및 서암


경희궁소개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離宮, 별궁)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원종, 추존왕)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광해군은 미리 위험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정당 등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다.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받았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다. 부지도 매각되어 그 면적도 당초의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듭하여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였고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경희궁내 서울중고등학교 터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경복궁과 더불어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1907년 일제는 경희궁 안에 통감부 중학교를 세웠으며, 지형도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는 등 크게 변형시켰다.


이후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등 얼마 되지 않은 건물들마저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이전되고, 또 경희궁 부지 2만 5천여 평을 떼어내어 전매국 관사를 지음에 따라 경희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다만 한 때 이곳에 경희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는 의미인 '경희궁터'로 인식되었을 뿐이었다.


사적 지정

1980년 9월 경희궁터가 사적 제271호로 지정된 이후, 1985년 6월 건설부 고시 제258호로 공원지정이 되었다. 서울시립박물관 · 미술관을 이곳에 짓기로 결정함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1986년 현대건설로부터 경희궁터를 교환 방식으로 취득하였다.


그리고 경희궁 복원 및 박물관 · 미술관 건립 공사에 앞서 1985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경희궁터의 유구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복원 가능한 건물과 박물관의 위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경희궁 복원사업

이 같은 발굴 결과와 문헌 고증을 거쳐 경희궁내 각 전각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1987년에는 흥화문을, 1991년에는 숭정전을, 자정전과 회랑은 1998년에, 태령전과 그 일곽은 2000년에 각각 경희궁내에 복원하였다. 다만 흥화문은 원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위치한 관계로 원위치에 옮길 수가 없어 서쪽으로 100여 m 이동하여 복원하였다.


경희궁전각 소개

흥화문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회관이 세워져 있어서, 1987년 100m 서쪽(구 개양문 자리)으로 위치를 이동 조정하여 현재의 위치에 이전 복원하였다.


금천교 (서울역사박물관 앞)

금천교

서울역사박물관 입구에 금천교가 있다. 물론 서울역사박물관 자리도 당초의 경희궁내 담장 안이었다. 그만큼 경희궁은 엄청나게 훼손되었다.


옛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인 돌다리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이다.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숭정문 / 숭정전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 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워낙 노후화하여 원래의 숭정전 건물 이전을 포기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1991년 복제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해설가님의 설명에 따르면 왕은 의자뒤의 계단을 통하여 나타나므로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는 연출을 하였다고 한다. 천장에는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천정 용의 발가락이 많을수록 용상 이용자의 신분이 높다고 한다. 예를 들면 왕과 태자의 거처 경우 발가락 수가 달랐다고 한다. 숭정문 천정의 그물망이름은 미국 대통령 이름을 닮은 '부시'라고 부른다고 했다. 비둘기등이 건물 천정에 살게 되면 뱀을 부를 수 있으며 분비물이 건물을 부식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자정문 / 자정전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었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다.

출토된 전돌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에 근거하여 현재의 건물을 1998년 복원하였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어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다.

태령전 / 영조 어진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2000년 복원하였다.


서암


서암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현재 서암을 새겨 두었던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융복전과 회상전 자리에 방공호를 설치

왕과 왕비의 처소였던 융복전 및 회상전 자리에 1943년~1944년 연합군의 비행기 폭격대비, 방공호를 설치하였다. 중요 통신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해설가님의 설명에 따르면, 안의 내부에는 물이 차서 배를 타고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1년에 한 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주관하여 접수 신청자에 한하여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고목 앞에서 해설가님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궁궐 길라잡이 홈페이지가 있다. 궁궐 탐방할 때 해설이 필요하면 미리 신청하면 도움이 되겠다. http://bit.ly/해설시간


고목나무(경희궁의 아픈 역사를 대변한다) / 서울특별시교육청 (옛날 경희궁내 부지였음)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경희궁 팸플릿


글이 길어져 사직단은 다음 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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