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의 정기 저녁 모임(2023.06.17. 토, 맑음, 불볕 폭염) 전에 전번 달 창덕궁 탐방에 이어 못다 둘러본 창경궁과 종묘를 둘러보기로 했다. 안국역에서 나와 창덕궁 앞을 지나 터널 위의 언덕을 넘어갔다. 우측(남측)에는 종묘가 담장을 별도로 하여 인접해 있다. 향후 창덕궁과 종묘를 일괄 관람할 수 있게 연결할 예정이라고 한다. 언덕에서 조경작업을 하고 있는 직원 분에게 창경궁 정문위치를 물어 보어 보았다. 조금 더 걸어가면 엘리베이터가 나오는데 그것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서,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담 따라 올라가라고 하셨다. 정문(홍화문)이 동쪽에 있다.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창덕궁방향에서 도보로 이동시 창경궁 이정표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거의 유일한 길이다.
창경궁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옛날 시골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홍학이 음악에 맞추어 무리 지어 춤추는 광경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 서울 구경했다. 그때는 창경원이라고 불렀다. 춘당지 근처 어디 아닌가 짐작하여 보았다. 여행은 빚을 내어서라도 가야 한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전군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부족한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다른 궁궐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자유로운 분위기며, 규모도 아담하다. 남. 서. 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다.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지었으며, 정치공간인 외전보다 생활공간인 내전이 더 발달했다. 세종과 성종의 웃어른을 모시는 공경, 효심이 궁전을 지은 것이다. 창경궁은 세종 즉위년(1418년)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수강궁터에 성종이 창건했다.
1483년(성종 14년)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추존왕, 세조의 맏아들-의경세자, 20세에 요절, 성종은 덕종의 둘째 아들임) 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세웠다. 13세에 즉위한 성종은 성년이 될 때까지 세조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또한 참혹한 인간사와 아픈 역사의 단면들이 숨어 있다. 사도세자의 뒤주사건, 장희빈의 저주사건이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궁을 창경원으로 격하 개칭하고 동물원, 대온실등 설치로 조선왕조에 대한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역사물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절대 안 된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1830년(순조 30년)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불탔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국보 1점(명정전), 보물 7점(홍화문, 명정문 및 행각, 옥천교, 통명전, 풍기대, 관천대, 팔각 칠 층석탑) 그리고 등록문화재 1점(대온실, 1909년 순종 2년 건립)이 있다.
주요 탐방코스는 다음과 같다.
홍화문>옥천교>명정문>명정전>문정전>숭문당>빈양문>함인정>경춘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풍기대>성종대왕태실 및 성종대왕태실비>춘당지>팔각칠층석탑>대온실(식물원)>관덕정>관천대>선인문>함양문>창덕궁(후원) 입구>월근문
홍화문
1) 홍화문(弘化門)
정문으로 홍화는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의미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옥천교
2) 옥천교(玉川橋)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다리 양쪽 아래에 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천 주변에 살구나무에서 익어 떨어진 노란 열매에 눈길이 저절로 간다.
명정문과 행각
3) 명정문(明政門) 및 행각(行閣)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명정전과 품계석
4) 명정전(明政殿)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이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가례 嘉禮)가 치러지기도 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품계석은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다.
명정전과 답도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한다.
용상과 일월오봉병 / 드므
명정전 앞 양 옆에는 ‘드므’라 불리는 큰 청동그릇이 있다. 드므에는 물을 가득 담아두어 화재예방의 의미가 있지만,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정전 (출처 창경궁 홈페이지)
5)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다.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는데, 문정전은 남향을 하고 있다. 문정전은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홍화문의 좌측)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숭문당
6) 숭문당(崇文堂)
국왕이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고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했다.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日監在玆)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일감재자는『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빈양문(출처 창경궁 홈페이지)
7) 빈양문(賓陽門)
명정전 뒤쪽 빈양문은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왕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통하기 때문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함인정
8) 함인정(涵仁亭)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이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을 노래한 중국 진나라 화가 고개지의 사시(四時)라는 시가 걸려있어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에 운치를 더해준다.
경춘전
9) 경춘전(景春殿)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곳이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 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 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 씨 등이 승하하였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다.
환경전
10) 환경전(歡慶殿)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통명전
11) 통명전(通明殿)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하여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았다.
마침 “무신년, 만세의 술잔을 올리다 “라는 1848년(헌종 14년) 왕실 잔치 기록물 전시회(2023.05.23.~06.25)가 열리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순원왕후 육순(60세)과 신정왕후의 망오(41세) 축하연 영상 기록물을 감상했다. 안내직원들이 친절하게 안내했고, 외국어 버전도 있어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통명전 뒤뜰
이곳에서 희빈 장 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일어났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 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
통명전과 양화당
희빈 장 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 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홍화문의 좌측)을 통해 나갔다. 전각옆에는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다. 뒤뜰에는 꽃 계단이 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통명전 측면과 자경전 풍기대 올라가는 계단
통명전 뒤쪽 언덕 숲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 씨를 위해지었다는 자경전의 터가 있다. 월근문 밖에 있는 사도세자 사당 함춘원을 항상 바라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고 한다. 월근문은 효심이 많은 정조가 매월 한번 창경궁 밖 동쪽에 있는 함춘원에 참배하기 위해 낸 출입문이다.
양화당
12) 양화당(養和堂)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과 삼전도 굴욕의 인조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영춘헌과 집복헌 (출처 창경궁 홈페이지)
13)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집복헌은 1735년(영조 11) 1월에 사도세자, 1790년(정조 14)에 6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다.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였다.
풍기대
14) 풍기대(風旗臺)
풍기대는 영춘헌과 집복헌 뒤 언덕 위에 세워져 있으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 세웠던 풍기의 받침대이다.
성종대왕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15) 성종대왕태실 및 성종대왕태실비
성종의 태를 묻어놓았던 태실과 그 제작과 수리 기간을 기록한 태실비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손이 태어나면 명당지를 찾아 태항아리를 묻어 보존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왕실 가족의 태실 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이봉하였다. 이때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성종대왕의 태실 석물을 1928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춘당지
16) 춘당지(春塘池)
이 연못은 춘당지라 부르는 연못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위쪽의 작은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다.
원래의 춘당지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로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다. 1909년에 일제가 이곳에 연못을 만들었다. 1986년에 우리 전통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한 것이다.
팔각칠층 석탑과 춘당지
17)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
춘당지를 따라 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팔각칠층석탑이 보인다. 이 탑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마식 탑으로 중국 명나라(1470년) 때 만들어졌다는 글귀가 탑신에 들어있다고 하나 둘러보아도 비전문가로서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기단은 사각형의 지대석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대온실
18) 대온실(大溫室)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다. 일본인이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궁의 전체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덕정(추정)
19) 관덕정(觀德亭)
대온실 오른쪽 숲에 정자가 하나 보이는데 이곳이 관덕정이다. 관덕정 아래에는 군사들이 활쏘기나 말타기 연습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관천대
20) 관천대(觀天臺)
문정전 앞쪽에 있으며, 천문을 관측하던 소간의를 설치했던 시설로 보인다. 최근에는 시간을 측정하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설치했던 시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향후 종묘와 연결되는 통로가 열릴 수 있는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선인문
21) 선인문(宣仁門)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 창경궁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이다. 동궁(東宮)의 정문으로 조정의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장희빈의 시신이 나간 문이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선인문 안쪽 뜰에서 사도세자는 문정전에서 영조의 명에 의해 문정전에서 뒤주에 갇혀 선인문(홍화문의 좌측) 안뜰로 옮겨졌다.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 장소가 선인문 바로 안쪽에는 두 거루의 꽈배기 모양 줄기가 얽혀 있는 회화나무 근처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회화나무 (선인문 안쪽에 위치)
10여 명의 단체 식물 탐방팀원들이 해설자의 설명을 열심히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22) 함양문
창덕궁의 후원(비원)과 창경궁이 연결된 출입문이다.
월근문(출처 창경궁 홈페이지)
23) 월근문(月覲門)
‘매달 뵙는다 ‘라는 뜻을 갖고 있는 월근문은 홍화문 북쪽에 있다. 이 문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동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이라 이름하였다. 정조의 효심이 느껴진다.
주목
주목
출구 쪽으로 나오다가 함인정 앞에 나무줄기와 가지가 붉은빛을 한 주목을 발견하였다. 사도세자와 장희빈의 한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한편으로는 세종과 성종과 정조의 효심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