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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과 후원(비원) 이야기

창덕궁과 후원

by 애바다

창덕궁및 후원(비원) 안내 지도

창덕궁(昌德宮)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있다.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되고,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조선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조선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오늘(2023.05.20, 토, 맑음)은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 전에 잠시 창덕궁을 탐방했다. 창덕궁은 10여 년 전 외국 근무할 때 한국 기업체를 외국인과 함께 출장 방문했었다.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고 오후 늦은 시간 김포 비행장 근처 호텔로 복귀했다. 프런트에서 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명소 추천을 부탁했다. 한국의 멋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직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창덕궁”을 추천해 주었다.

늦가을이라 해는 넘어가며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택시를 급히 잡아타고 창덕궁 돈화문 입구에 도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출입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5시 30분이 폐문시간이었다. 퇴근을 준비 중인 책임자 분께 간곡한 부탁 말씀을 드렸다. “창덕궁을 보기 위해 비행기 타고 왔다”라고. "열여라! 참깨!"같은 응답이 왔다. 마지막 탐방 그룹이 외국어 해설가와 함께 5분 전에 출발했으니 빨리 걸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문을 열어 주셨다. 덕분에 창덕궁 관람을 무사히 마치고, 인사동을 거쳐 청계천 주변에서 삼계탕을 먹은 추억이 있었다. 참, 돈화문 앞 광장 진입하기 전 보행자 교통신호 대기 중에 빨간 콜라병을 허공에 휘리릭 던져 놓고 척하고 받으며 마술을 보여 주었던 생기 발랄한 소녀를 잊을 수가 없다.


당초 오늘 계획은 창덕궁, 창경궁, 종묘를 둘러볼 계획이었으나 창덕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관계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창경궁과 종묘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굳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한다면, 경복궁이 격식을 따지는 남성적 근엄한 궁이라면, 창덕궁은 사람중심의 여성적인 친근감이 드는 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태종이 혈육 간 피의 역사가 새겨진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좋아했다고 한다. 후원(비원)이 창덕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매력 포인트라고 하겠다. 외국인들이 곳곳에 많이 보였다.


참고로 창덕궁과 후원은 담을 경계로 인접해 있으나, 출입구가 별도로 나있다. 즉, 입장권을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 비원 입장권 구입은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해야 한다고 후원 홈페이지에 나와 있으나, 돈화문 좌측 매표소 혹은 비원 매표소에서도 구입할 수 있었다. 20명~30명 단위로 정해진 시간대에 단체 입장하는 시스템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해설사님과 동행하여 이동하면, 각 건물과 지명별 상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개별 행동하거나 단체행동하거나 별반 시간차이가 없다. 해설사님으로부터 얻을 것이 많다. 나는 시간이 촉박하다고 서둘러 한 바퀴 돌고 나오다가 해설사와 탐방객 일행을 만나 다시 듣고 나왔기 때문에 총시간이 오히려 더 소요되었다. 되돌아 나오면서 해설사 네 분이나 각각 만나 현장의 생생한 해설 강의를 들었다. 탐방경로는 다음과 같다.


1. 창덕궁

돈화문>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성정각>궐내각사>금천교>낙선재


2. 후원

부용지(주합루)>애련지(의두합)>연경당>존덕정>옥류천(당일 폐쇄, 내용은 홈페이지 참조함)


1. 창덕궁

돈화문

1)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이며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있어 궁궐의 정문 돈화문은 남서쪽에 치우쳐져 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크다. 앞에 넓은 월대(月臺, 달을 바라보는 기단형식의 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을 이용했다.

인정전

2)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 마당에 품계석이 박혀 있는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이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는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다. 월대 바닥에는 둥근 환형의 쇠고리가 바닥에 박혀 있는데, 인정전 외벽 상단에 쇠고리와 연결하여 행사 시에 햇빛을 차단하는 차양막을 설치 시 밧줄을 걸어 고정시키는 고리역할을 한다. 강점기에 품계석이 있는 광장의 박석을 일제가 철거하고 잔디를 깔았다고 한다. 조선 왕실의 전통성과 권위를 훼손하기 위함이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물은 절대 훼손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견치석으로 복구하였지만 현재의 박석 표면을 너무 다듬어 햇빛 산란 효과가 반감되어 눈이 부시다. 박석 사이의 틈이 배수구역할을 잘한다고 한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왕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인정전 내부

인정전의 내부
정면에 임금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해설사 말씀에 따르면, 왕의 외부 행차 시에는 항상 병풍이 함께 따라갔다고 한다. 왕은 남쪽을 향해 앉고 뒤에 병풍이 배경이 된다고 하였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 유입의 산물이다.

선정문

3) 선정전 (宣政殿)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었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 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4) 희정당(熙政堂)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변경되어 꾸며졌다.

대조전

5) 대조전(大造殿)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대조전 내부 전경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대조전 뒷마당

대조전 뒷마당은 계단식 화단, 굴뚝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는데, 왕비의 심신을 달래주기 위함이다.

성정각

6) 성정각

세자가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궐내각사

7) 궐내각사(闕內各司)

상기 1)에서 6)까지 돌아보고 낙선재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뭔가 허전했다. 안내 팸플릿을 보니 궐내각사와 금천교를 빼먹었다.

규장각

특히 규장각이 보고 싶었다. 인정전 앞 품계석 마당 좌측(서쪽)에 궐내각사 및 금천교를 통하는 통로가 있다.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업무편의상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궐내각사 동선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奎章閣),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선원전

선원전에서는 역대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금천교

8)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 위에 설치되어 있다. 어구(御溝) 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1411년(태종 11년) 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되었으며, 상면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를 2개 튼 형식으로 물가의 축대는 부벽(扶壁) 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그 위에 동물상을 조각한 이주석이 세워져 있다.

홍예 / 해태상 / 거북상

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으로 장식한 법수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鬼面形)이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인다.

낙선재

9) 낙선재(樂善齋)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후궁인 경빈 김 씨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다.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후원 매표소 / 창경궁 입구

2. 후원

비원이라고도 한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고, 가끔 호랑이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에 왕들이 창덕궁을 좋아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다. 성정각 일원에서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따라 올라가면 왕실정원의 초입부인 부용지에 이른다. 후원 입구에서 창경궁으로 진입하는 출입문이 연결되어 있다.

부용지

1) 부용지(芙蓉池)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약 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부용정 / 영화당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芙蓉亭)은 연못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는 어수문(魚水門)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翠屛)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애련지와 의두합 / 불로문

2) 애련지(愛蓮池), 불로문(不老門)
1692년(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연경당

3) 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 경에 창건했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선향재 / 화장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 있는 점도 유사하다. 연경당은 120여 칸이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햇빛을 차단하여 서책을 직사광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궁중 화장실을 살펴보았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존덕정과 폄우사 / 관람지

4) 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砭愚榭)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옥류천 (출처 : 창덕궁 홈페이지)

5) 옥류천(玉流川)
아쉽게도 옥류천은 출입금지 표지판에 걸려있어 들어가 살펴보지 못하였다. 특히 청의정의 볏짚으로 덮은 초가집이 보고 싶었다. 후원 홈페이지 글을 옮겨 놓는다.

청의정 (출처 : 네이버 백과)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참조 자료>

창덕궁 및 비원홈페이지

창덕궁 팜플릿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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