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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민 Aug 07. 2023

성장의 욕망이 만든 독서의 '환상'

내 인생의 데이터 베이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자크 라깡이 이야기한 것처럼 오이디푸스 콤플랙스로 인해 헛 된 것을 꿈꾸며 환상대상 A를 갖는 노력일까? 아니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언어로 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 욕망일까? 어느 것이든 라깡은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라고 본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가져보지 못했던 것을 잃어버리고 되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성장하는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성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도리어, 조금 더 거룩해 보인다. 성장하려는 욕망을 갖는 사람들은 마치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지상에 살게 되면서 잊고 살았던 원래 자신의 원대했던 무엇을 되찾아 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마치, 헤겔의 절대지가 대상의식을 지나 자기의식, 이성, 정신, 종교를 지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절대지라고 발견한 것처럼 성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인다. 마치, 자기 자신이 절대지였던 것을 잊었으나 끝내 알아채기 위한 여정이랄까.. 그런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나 자신에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스스로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일, 나의 첫 번째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보았으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겠지만 내게는 기독교적 신앙이 있다. 과거의 나는 분명 의식 밖에 객체적으로 신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현재 나 자신의 신앙에 관해서는 추후에 다루겠다). 그렇기에, 고전적인 기독교적 교리를 신학적으로 배우게 되면서 이성(합리적인 판단)은 신성을 가로막는 죄악임으로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을 통한 계시만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라고 가르친다. 물론, 이런 교리가 자신의 삶을 원활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고 타자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언제나 환영이다. 이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런 상황들이 내게 이성의 성장을 다른 말로 성장의 욕망을 억눌렀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버린 것처럼 신을 배신한 것 같은 감정을 주었다. 그렇기에, 처음 성장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었을 때는 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은 인과적이다. 과분한 내 욕망은 커지기를 멈추지 않고 신앙의 영역을 월권하여 더 이상 죄책감보단 내가 더 나아지고 싶은 성장의 욕망으로 변해갔고, 조금 시간이 지나 그 욕망은 지적 욕망으로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책을 읽기로 다짐을 했고 중고서점에 가 처음으로 뽑아둔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였다. 


 이 책은 밑바닥을 기었던 한국 남성이 책을 읽고 변한 것을 주제로 기술해 나갔다. 쉽게 말해 독서로 성공했다는 것을 책으로 집필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정말 독서를 하면 뭔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에서 성장의 결과를 마주할 것이고 성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독서를 한 권수를 세어보니 200권이 넘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1000권의 책을 읽었다. 양질의 책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읽어갔다. 그저, 읽고 또 읽었다. 더 많이 읽기 위해서 속독을 배우고 읽었다. 하루에 몇 권을 읽을 수 있는지 계획을 짜서 읽었고 학교, 직장을 퇴근하면 어김없이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 허기졌다. 마치, 밑 빠진 둑에 물 붓듯이 지적 허기와 갈증이 나를 더 괴롭혔다. 그리고 시간이 무르익은 시숙에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성장을 담보로 한 환상, 신기루를 뒤쫓고 있었던 것임을, 그리고 사실 그 환상은 내 앞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내게 너무 달콤해서 더 이상 정신 차리지 못하게 했다.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기 전까지 말이다. 


 욕망은 실체가 없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삶과 안정감을 위해서 나의 욕망을 여러 것들에 투사하면서 신을 모시듯이 귀하게 여긴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신념이 되었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 의미를 기독교 신학적으로 접근하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과도 같다. 어떻든 이런 욕망이 내 안에서 '성장'의 욕망으로 변해갔고 더 나은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 자의적으로 개인적인 신앙을 넘어섰다. 마치, 아담의 선악과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먹은 것에는 그 어느 것도 계약된 것이 없었다. 아담한테 이야기한 것처럼 죽음을 결과로써 마주하게 한다거나 고통이 있다거나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죽음을 향해가고 있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횃불을 이어받고 당당히 어둠 속에서 홀로 서 나아가려는 것이다. 드디어, 주체의 탄생을 알리는 개인의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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