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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디아 Sep 22. 2022

판가 가이드: 시작이 어려울 뿐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게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무언가 시작하면 그 이후는 비교적 수월하게 일이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큰 공을 굴릴 때, 그 처음이 가장 힘들고 어렵지만, 이내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처음보다는 더 작은 힘으로도 굴릴 수 있다. 회사일 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추진해 나가야 할지... 할 엄두를 못 내었는데, 어찌어찌 시작한 일은 처음의 걱정과 두려움보다는 수월하게 진행되어 마무리된 경우가 많았다. 




  사업 초기 두세 거래선에만 제품을 팔다가 안정적인 매출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고객들에게도 반제품을 팔기로 결정하였다. B2C 기업들은 판매 관련 활동이 일반화되어있지만 B2B 기업들은 대부분이 특정 고객향으로 개발해 공급하는 Customized 제품(고객향 제품)이다 보니, 별다른 판매 관련 활동이 필요치 않은 게 대부분이다. 


  이전과 다르게, 다수 고객에게 제품을 팔기 위해서는, 머리는 빼고, 어깨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전 정해진 고객에게만 팔던 방식과는 다른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 가능한 제품이 있어야 했고, 고객에게 전달할 제품과 관련된 기술적 정보들이 있어야 했으며, 프로모션과 기술지원의 체계도 갖추어야 하는 등. 


  다수 고객에게 동일 제품을 판매하려는 것은 반제품의 Commodity화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활이 시위를 떠나 날아가듯, 관련 부서 담당자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해 약 일 년의 노력 끝에 차츰 성과를 보기 시작했고, 새롭게 추진한 사업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1~2 년에 걸쳐 신제품을 만들고 판매하던 중, 고객 접점 있는 영업으로부터 건의사항이 하나 들어왔다. 판매 제품의 정보와 가격을 한눈에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엑셀을 만들어 주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근무하던 주재원이 요청한 사항이었다. 영업에서 필요할 때 자체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지만, 제품 정보와 정기적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힘들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엑셀 자료를 판가 가이드라 불렀는데, 정기적으로 제품과 가격이 업데이트되어 영업에 배포되고, 다시 대리점에 보내져 활용될 예정이었다. 



  2013년 만든 이후 지금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관련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해 배포하고 있는데, 처음 만들었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그 사이 조직이 계속 바뀌기도 하고 담당자가 바뀌기도 해, 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수년이 지나니 처음의 필요성과 이유는 사라졌고, 지금은 그 행위만 남아 담당자들이 수행하고 있다.


  처음 영업 요청을 받았을 때는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수백 개 제품의 정보와 가격의 정리를. 하나하나 사양서와 시스템을 확인하며 엑셀에 옮겨야 하는 일명 '노가다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필요성과 이후 사용의 유용성에는 충분히 공감이 되어 맘을 가다듬고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정보들을 기입할 틀을 만들고, 그다음에는 대상 제품들 정보를 기입하고, 이후 정기적으로 어떻게 운영할지 정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판가 가이드 작업 방향을 정한 후 본격적으로 진행을 시작했다. 방향을 정하고 주변 동료들에게 취지를 설명하니 일의 진척이 한결 수월해지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도움을 주고 지원해 주었다. 


  영업 담당자들이 고객 관리를 위해 활용하고 있는 유사한 목적의 자료 서너 개 전달받아 제품 외 상업적 용도로 필요한 항목(예: 포장 규격, 최소 생산 단위, 인증 등)과 고객들이 보는 중요 사양을 입수해 판가 가이드 포맷을 발전시켰다. 

  그런 다음 생산 부서의 도움으로 양산 중인 제품 리스트를 전달받아, 제품 기준의 분류 체계로 정리하여 엑셀에 등록할 제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했다. 특정 고객향 제품은 타 고객에게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후 마케팅팀 내 제품 담당자 여러 명이 나누어 제품 정보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엑셀에 기입해 일차 버전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운영과 관리를 어떻게 할지, 사용할 부서와 운영할 부서 담당자들이 모여 업데이트 주기와 자료 배포 방식에 대해 토론해 정리하였다. 


  이후는 처음 만들어진 양식에 주기적으로 꼬박꼬박 업데이트해 사용할 부서 담당자들에게 메일로 배포해 사용했다. 운영하면서 접수된 피드백을 기반으로 한두 번씩 양식을 보완하고 불편한 점들을 개선해 훨씬 알차고 똑똑한 가이드로 발전해 나갔다. 

  지금은 모두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자료이지만, 처음 그것을 요청하고 만든 사람, 발전시킨 사람들을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우리의 판가 가이드가 창대까지는 아니라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었으니 대견해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작이 어려워 주저했지만, 어쨌든 출발해 나아가니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었고, 그들의 도움과 지원으로 계속 굴러 가 하나씩 빈 구멍이 메워지며, 튼튼하게 보완되며 발전해 나아갔다. 작년 판가 가이드는 꽤 그럴듯하게 근사하고 전문적 냄새가 났다. 


  무언가 새로운 걸 해야 할 때는 주저하게 된다. 걱정과 두려움에 첫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필요성과 효과를 공유해 설득하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완벽에 기대면 그 시작이 어렵게 되는데, 그냥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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