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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디아 Sep 19. 2022

기술 워크숍: 집단 지성의 힘을 모으다

  매년 고객사와 경영진 미팅을 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말이 기술 워크숍을 하자는 것이다. 기술 워크숍은 미래의 신기술을 중심으로 양사가 서로 공유하고 토론하는 시간인데, 주로 공급사에서 신기술을 포함한 제안사항을 담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영진 미팅 이후 고객사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3~5개월 후 워크숍 일정을 잡고 본격 준비에 들어간다. 


  시장 도입기나 시장 성장기에는 새롭게 검토되고 개발 중인 기술이 많아 기술 워크숍은 공급사 입장에서 준비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회사 내에서 개발 중이거나 검토 중인 기술을 조사해, 무엇으로 고객에게 미래 가능성을 보일지 '선택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시장 성숙기에는 공급사인 우리의 밑천도 거의 바닥이 되어 무엇으로 기술 워크숍을 할지, 실무자 입장에서는 무척 어려운 과제였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는 속도가 더디어졌을 뿐 아니라, 고객사도 이제 우리 기술과 솔루션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터라, 새로울 게 없으니 제안할 꺼리가 없었다. 제품 담당자인 나에게 이 숙제가 떨어졌고, 사실 직접 나에게 온 건 아니었지만 해야겠다는 생각에 키를 잡고 시작했다. 관련 개발 담당자들과 상의했지만 그들 역시 답을 갖고 있지 않아 자칫 빈 손으로 참석하게 될지도 모를, 한숨밖에 나오지 않던 상황이었다. 


  진행 중인 과제와 몇 개월 전 작성한 로드맵 안에서 안건을 찾았지만, 고객사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새로운 게 없었다. 꽤 오래 거래하였고, 매년 수 십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우리에 대해 어쩌면 더 잘 알지도 모를 고객사였기 때문이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선택한 방법은 매주 정해진 시간에 관련 담당자들이 모여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하는 것이었다. 기술, 개발, 영업, 상품기획 담당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아이디어를 내는 회의를 시작했다. 


  이런 회의는 오랜만이라 처음에는 운영이 원활하지 못했다. 매번 결론을 내고 담당자들이 할 일을 딱딱 정해 끝내는 회의를 했는데, 이 회의는 성격이 달라 그 운영도 달라야 했던 것이다. 익숙지 않은 성격의 회의였다. 두세 번 회의를 만족스럽지 않게 끝내고 나서야 방식을 바꾸었다. 

  지금 필요한 건 참석자들이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고객에게 제안해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인지 분석하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서면 초기 구현까지 시험해 보아야 했다. 회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달리 운영해야 했다.


  먼저 나 자신부터 긴장을 풀고 여유를 가지려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누군가 우스개 소리를 해도 같이 맞장구치며 분위기를 띄웠고, 누군가 정말 어이없는 의견을 내놓아도 비판 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또 다른 누군가 아이디어를 더해 꽤 그럴듯한 모양으로 다듬어 주었다. 참석자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견을 맘껏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여유를 갖고 대했다. 각자가 그동안 여기저기서 들은 정보를 기억해 내고, 서로 비난이나 비판 없는 분위기에서 부담 없이 얘기할 수 있는 회의를 의도적으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꾸준히 모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 3시였는데, 월요일은 휴일 이후 출근으로 심적 부담이 있어 피했고, 화/수/목은 이런저런 일로 모두가 분주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금요일은 주말이 코 앞이니 마냥 기분 좋은 날일 뿐 아니라 다음 날이 토요일이니 당장 급한 안건이 생기는 경우도 적었다. 오후 3시는 한두 시간 회의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마무리하면 금요일 칼퇴도 가능한 시점이었다. 

  금요일 퇴근하기 전, 가장 즐겁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한 주의 끝이 이 회의가 되었고, 불참하는 이도 거의 없었으며, 모이면 밝고 건강한 기운이 회의실에 가득 돌았다. 


  브레인스토밍으로 제안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고객이 관심을 보일 것인지 토론하고, 담당자별 추가적으로 검토할 내용을 숙제로 받아, 일주일 현업 하는 중간 짬을 내 조사한 뒤 회의에 참석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회의 전 담당자들에게 전화나 메신저를 보내 잊지 않고 숙제를 해야 함을 다시 한번 주지시켰고,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차곡차곡 단계를 올려가며, 우리가 낸 솔루션이 고객사 입장에서 어떤 이점이 있는지 토론하며, 그렇게 기술 워크숍을 준비해 나갔다.


  8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준비 회의를 하고, 12월 중순 기술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4명이서 미국 비행기를 예약했다. 따뜻한 미국 남부지역에 도착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를 차 타고 다니다 보니 이국적인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고객 워크숍 전날 현지 사무실에 모여 우리가 준비한 안을 현지인들에게 설명하며 공유하고, 일부 사안은 또다시 토론을 하며 그렇게 내용을 다방면에서 검토하고 내용을 복합적으로 층층이 쌓으며 워크숍 자료를 보완했다. 미팅 전날까지 보완하고 발전시켰다.


  고객사에 도착해 기술 워크숍을 준비하고 고객사 담당자들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었다. 본격 시작된 워크숍, 고객사 담당자 중 한 명이 굉장히 깐깐하고 까탈스러워 한국에서 준비하며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도 크게 난감한 상황 없이 4시간에 걸쳐 미팅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준비한 솔루션을 설명하고, 고객사와 Q&A를 하고, 우리 안에 대한 고객사 담당자들의 피드백을 받았다. 준비한 내용을 모두 설명했고, 고객사와 토론했고, 까칠한 답변이 있기도 했고 웃음이 있기도 했으니... 비교적 성공적으로 워크숍이 끝났다 생각했다. 준비한 내용의 90%는 전달하였다. 물론 중간중간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담당자들의 시니컬한 요청사항들이 있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4개월 전 스케치부터 시작해 틀을 잡고 형태를 만들어 색을 입히는 과정을 통해 기술 워크숍을 준비했고, 준비가 다부졌던 만큼 기술 워크숍 당일은 고객사의 시니컬한 반응이나 큰 사고 없이 마지막 장,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보여주며 끝을 맺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고객사에서 굉장히 흡족해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며 기분 좋게 출장을 마칠 수 있었다. 워크숍이 끝난 다음 날 참석한 고객사 구매 담당자가 향후 3개월치+α 주문을 보내왔다. 기술 워크숍의 내용이 단기적으로 직접 비즈니스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기술에 목말라있던 고객사에게 4개월 동안 준비한 솔루션으로 장기적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우리의 잠재력을 보여주었고, 계속 좋게 지내자는 것을 우회하여 전달했으니 절반은 성공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기술 워크숍 준비 회의 때는 막막했다. 회의실에 앉은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할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고, 과연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 있을까란 의심이 팽배했다. 하지만 여러 명이 모여 자유롭고 부담 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다른 누군가 그것을 발전시키고, 서로 협조하는 분위기에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하나씩 나아갔더니 기술 워크숍을 개최할 있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집단 지성의 힘으로 끝을 무사히 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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