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못 먹어도 GO!
제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남편을 여의셨습니다. 저한테는 외할아버지죠.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중학생 시절, 돌아가셨습니다. 외삼촌들도 다 학생들이셨을 때죠. 그 시절, 가장 황망했던 사람은 제 어머니도 외삼촌들도 아니고, 외할머니셨을 겁니다. 세 남매를 어떻게 키워야할지 참 막막하셨을 것 같아요.
안 해본 일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하기도 했고요. 통닭을 튀기기도 했고요. 옷 수선 일을 했다고도 들었습니다. 악착같이 버셔서, 세 남매를 모두 대학교에 보냈습니다. 대단하시죠? 당시로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자식 하나 대학교 보내기도 힘든 시절이었거든요.
저는 부모님과 함께 외할머니 손 밑에서 자랐습니다. 제 할머니는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제가 아는 제일 가는 때때모찌(구두쇠 경상도 사투리) 십니다. 심지어 냉장고 문을 못 열게 했습니다. 냉기가 빠진다고요. 이래저래 많이 대들기도 했던 기억입니다만, 사실 그런 기억들은 많이 나지 않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가 5살 때 쯤이었던 것 같은데요. 차 안에서 할머니와 함께 바깥에 핀 꽃들을 보며 “예쁜 꽃~” 하며 좋아했던 순간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저도 까불거리기 시작할 때 쯤, 할머니께서 친구들분과 화투를 치시며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못 먹어도 고다!”
제 할머니는 이 말을 자주 외치셨어요. 그 목소리가 기억에 납니다. 아주 신난 목소리였어요. 저는 화투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저 관용구는 좋아합니다. ‘실패할지라도 나아가겠다.’ 아무런 이익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도전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아마, 실패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럴 여유조차 없었던 제 할머니의 바람이지 않았을까요?
한 평생 그 무거운 책임감과 압박감에 눌려, 삼 남매를 멋지게 키우겠다는 그 신념 하나로 위대한 근성을 보여주신 할머니. 오히려 그 책임감 덕분에 더 멋진 분으로 기억에 남기도 하겠지만, 만약 자유로우셨더라면, 또 얼마나 사회에 멋진 공헌을 하실 수 있었을 까요? 요즘은 이상하게도 외할머니 생각이 자주 납니다. 지금은 떠나고 안 계시지만, 그 근성을 제가 이어받아 멋지게 펼쳐보고 싶습니다.
“할머니! 저도 못 먹어도 고!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 이 책이 ‘실패해도 좋으니, 눈앞의 당장 이익이 없더라도 좋으니, 도전하고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