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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눅한과자 Jul 30. 2024

빈티지? 부티지!

티 내지 않는 부자들



 수수한 차림으로 마트에서 할인 품목만을 골라가는 주민들을 보며 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도 이러면 저 휘황찬란한 강남의 명품샵과 고급 식당들, 슈퍼카들은 누가 소비하는 것이란 말인가. 적어도 강남에 수십억 짜리 집을 '깔고' 사는 사람들은 돈 걱정 안 하고 쓰는 거 아니었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동네 산책길에서도 주민들의 행동을 관찰하게 된 것이. 문득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강남의 구축 아파트에 잠시 살 때 본 차들이 떠올랐다. 곳곳에 붙은 젖은 낙엽과 새똥 사이로 엠블럼을 반짝이던 '억' 소리 나는 차들. 출퇴근길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와 달리,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익숙한 듯 무심한 듯 차를 닦았다. 지하주차장이 있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 온 뒤에도 어딘가 마음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T사의 전기차와 P사의 스포츠카 사이에 주차할 때 그 긴장감과 떨림이란!


 차뿐만이 아니다. 가족 행사 때마다 방문하는 집 근처 식당 늘 편한 차림으로 동네를 산책하는 어르신들이 반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쩌다 큰맘 먹고 온 우리와 달리, 자리가 익숙한 듯 스스럼없이 식사를 즐기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시곤 했다.


 맞다, 가구의 사례도 있었지. 아파트 단지에서 위용을 드러내던 가구를 마주쳤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백화점 내 특이한 매장이 있길래 호기심에 둘러보다 발견한 그 소파가 틀림없었다. 우리 집 것보다 가격표에 0 하나가 더 붙은 그 모델.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도 명품만 모아놓은 편집샵이 따로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머쓱했던 기억이 난다. 아내가 처음 그 가게의 이름만을 얘기했을 때 솔직히 카페 이름인 줄 알았기에.


 꼬리는 무는 생각 속에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오래 입은 듯 편한 운동복을 걸치고 천변(川邊)을 닐다 고급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람들도, 마트 마감시간을 기다려 20% 할인된 과일을 손에 들고 외제차에 오르는 이들도 모두 이 동네 주민인 것이다.

 


 아내는 이런 모습'쓸 데는 쓰고, 아낄 데는 아낀다'라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소비 스타일도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결혼 이후 아내가 '사치'라 불릴만한 소비를 한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바로 강남 집과 자동차(비록 우린 국산이지만)를 샀을 때다. 10년 넘게 살 집과 탈 차를 살 때만큼은 아끼지 말자고 했다.  반면, 피곤해도 택시는 회사에서 지원해 줄 만 탄다는 그녀 나의 낭비벽(?)을 수시로 지적했다. 아이 잃어버린 유모차 부품을 찾지 못해 몇 만 원 주고 내 멋대로 재구매했을 때 어찌나 분노하던지(잃어버린 부품은 불행히 며칠 만에 발견됐다)!

  

 물론, 이런 소비습관이 보편적 '강남 스타일'인지 내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최근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는 자산가(資産家)들의 모습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이든, 아니면 사업으로 돈을 번 사람이든, 전달 매체가 TV든, 책이든, SNS든 간에 부자들은 말한다. '허투루 돈을 쓰지 말라. 쓸데는 쓰되 절약하라, 부자 되는 데는 왕도가 없다. 일확천금을 노리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라.'

 특히 내가 자주 보는 채널의 작가분은 동영상 도입부마다 할인행사 때 산 중저가 브랜드의 옷을 보여주며, 당신들도 평소에 아끼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유명 프로게이머인 '페이커' 이상혁 씨의 언행이 담긴 인터넷 '짤'을 본 적이 있다. 동영상 재생 중 자꾸 중간 광고가 나온다고 투덜대는 그에게, 동료들이 유료결제를 하면 광고 없이 콘텐츠를 볼 수 있다며 '프리미엄 구독'을 추천해 준다. 그러자 그가 답한다. "돈 없어"라고(참고로 그의 연봉은 알려진 것만 50억 원이라고 한다). 월 15,000원을 아끼기 위해 매번 5초씩 기다리는 그 모습이, 할인하기를 기다려 장을 보는 '강남 주민'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 우연이었을까.


 그들의 소비가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 한 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보다는 스스로가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곳에만 돈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재테크 요령 없이 회사만 오갔다'며 몇 번 마주치지도 않은 남의 집 사위에게 불평을 늘어놓던 장모님 댁 앞 집 아주머니. 그녀의 정체가 자녀들에게 한 채씩을 물려준 강남 다주택자인걸 알게 된 날도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던 건, 이들의 소비행태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어서일까.


 드러내지 않는 부자들. 편해 보이지만 결코 후줄근하지 않은 그들의 빈티지한 패션이 슬슬 '부티'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방송에서 캡처한 '페이커'의 알뜰함. 저작권 문제 등이 있을 시 타 사진으로 대체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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