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인 남편은 한국어 포함 4개 국어를 했었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하고 프랑스, 러시아 등 발음이 어려운 언어의 노래도 현지 감성 충만하게 소화했다. 특히, 우리말은 어찌나 잘했는지, 센스 있는 유머감각으로 날 언제나 들었다 놨다 하며, 내 얼굴에 웃음주름을 만드는데 한몫했다.
실어증* : 언어장애로서, 특정 뇌영역에 문제가 발생하여 언어를 이해하거나 구사하는 능력에 장애가 발생하는 증상
어느 날 남편이 실어증*에 걸렸다.
이 무시무시한 증상으로 아예 소통이 안 되는 시절. 배가 고프면 '밥', '물'처럼 음식과 관련된 단어를 얘기한다던지,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엄마', '너', '사람' 등 뭔가 유추가능한 단어 하나라도 말해줬더라면... 스무고개 아니 100고개를 해서라도 남편이 하고 싶은 말을 찾아줬을 것이다. 의미 없는 부사만 되풀이하는 남편과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하다 서로 지쳐 다시 침묵하고 마는 날들이 한참 지속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 그냥 바라보면 ~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 - 초코파이 cm송
아니, 말하지 않으면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우린 그저 바라보면 안타깝고, 괴로웠다. 부부간의 불통이 답답한 것보다도아이들의 아빠가 말하지 못한다는 그 상실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생겼고, 아주 간단한 소통이 될 무렵. 남편은 나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기 원했고 그럴 때마다 여전히 특정 단어 하나만 반복했다. (남편의 주된 실어증 증상) 계속 무언가 말하려고 시도했지만 겨우 입안에 걸리는 한마디 말만 읊조리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여보, 답답하지? 말 못 해서 많이 힘들지?"
...
"그. 동. 안. 다. 해. 써."
지금까지 살면서 말을 많이 했으니 괜찮다며, 수많은 말들을 여섯 글자에 담아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을 끌어내며 우리의 아픔을 개그로 승화시키는 나의 비엔나 오빠.
어차피 부부는 평생 말이 안 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젠 아내 말을 잘 들어주는 과묵하고, 무게 있는 남편으로 그의 품격이 올라갔다.
아, 이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실어증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역시 침묵은 금이다.
물론, 남편이 다시 예전처럼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남편의 진심 어린 기도,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는 성경이야기, 오페라 이야기, 주옥같은 명언들...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두 아이들이 성장하며 필요한 수많은 조언들이 아빠의 입술을 통해 전달되기를 바라고, 아빠의 깊은 생각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가 아이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될 텐데... 안타깝고, 속상함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감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고, 그 가운데서 성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