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꼭 피곤해서 녹초가 되면 - 쉴 타이밍이 생겨 식탁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면 이때다 하고 - 손톱깎이를 가져와 쓰윽 내민다. 순간 미간에 주름이 쫙! 잡히며, 짜증이 확! 올라온다.
"벌써?"
그러고 보니 내 손톱도 불편할 만큼 자라 있다. 관리해야 할 손발톱의 개수가 내 것 포함 80개. 40개는 "가만히 좀 있어봐아~" 잔소리가 동반되며, 남편의 두꺼운 손발톱 20개 중 5개는 강직된 손가락을 펴가며 깎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자 큰아이가 본인 것은 물론 이젠 아빠의 손발톱을 위생을 담당하고 있다. 1,000원의 보상이 따르는 일이지만, 자처해 아빠의 손발톱을 깎아주는 7살 아들이 있어 든든하고, 기특하고, 고맙다.
To. 태리에게
아빠의 불편함이 우리에게 감사로 승화될 수 있게 엄마가 늘 기도하고 있어.
밝게 자라주어 너~무 고마운 우리 아들! Grande Amore Mio. 사랑해 아주 많이~
난 체구가 작다. 남편은 쓰러지고 20Kg이나 감량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몸집의 2배 정도 크다. 길을 가다 남편이 한쪽발을 쓱 내민다. 한동안 다이얼운동화(운동화끈이 풀리지 않고 한 손으로도 쉽게 끈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운동화)를 신더니 다시 끈 있는 운동화를 고집한다. 쪼그리고 앉아 멀쩡해 보이는 체격 좋은 남자의 운동화끈을 묶어주는 아담한 여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여자가 잘못을 많이 했나 봐...'
혹시 어디선가 덩치 큰 남자의 운동화 끈을 묶어주는 자그마한 여자를 본다면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본인확인이 되어야 해서요. 본인 맞으신가요? 본인 아니면 안 되는데요..."
장애가 있는 남편에게 장애가 되는 상황들이 일상 속 곳곳에서 마주한다.
"아.. OOO 씨 배우자인데요, 남편이 말을 못 해서요..." 주저리주저리...
생각해 보면 유럽 살 때 말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특히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선 까막눈이요, 말소리는 들리지만 알아먹을 수 없는 수많은 상황들...
그래, 남편은 아직 현지언어가 서툰 것쯤으로 맘 편히 생각하자!
식당, 카페 등 셀프서비스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우리나라. 주문부터 마무리까지 전부 나의 몫이다. 그때 옆 테이블에 자상한 남편이라도 등장하면 나의 5성급 호텔 서비스의 질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옆 테이블 아내는 가만히 앉아서 남편이 물어다 주는 모든 것을 편안~하게 누린다. 그때 아이가 "엄마~ 쉬 마려~" 그 순간 남자가 스프링처럼 일어나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간다. 와우! 100점 만점. 기립박수를 칠 뻔했다.
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빠 새, 엄마 새 역할을 다 해야 한다. 한껏 대접받는 그녀들이 부럽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외출할 수 있는 이 기적 같은 상황에 감사하는 능력을 더 갈고닦을 수밖에...
To. 남편에게
나 늙으면 풀서비스 기대할게요.
"아빠~ 책 읽어주세요~"
아뿔싸! 오늘따라 글밥이 너무 많은 책을 골라온 우리 둘째. 남편의 멋쩍은 미소와 흔들리는 동공. 집안일로 정신없는 내게 눈빛으로 SOS를 보내지만 냉정하게 한마디 덧붙인다.
"어머! 우리 태양이 재밌는 책 골랐네~ 여보~ 나도 듣고 싶어요~."
물러날 구석은 없다. 누구보다 무서운 언어치료선생님이다. 떠듬떠듬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가는 남편. 쓰러지지 않았다면 세상제일 딸바보로 등극했을 텐데... 단어 사이사이 공백만큼 아빠와 어린 딸의 마음의 거리가 있다. 이 슬픈 간극이 하루빨리 좁혀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 그리고 그 가족들에겐 일상이 커다란 장애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특히 마음이 불편한 상황이나 오해받는 상황들...
가족들은 더 피곤하고, 더 불편한 상황들 속에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를 자주 꺼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장애물 앞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그래도 곁에 있음에 감사하며 잘 이겨내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우리 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