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이대범 다시, 시작하다
유럽에서 세계 무대를 꿈꾸며 활동하던 남편은, 언젠간 국내의 큰 무대에도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탄탄한 예술 기획사의 지원을 받으며 리사이틀을 열고, 화려한 오페라 속 주인공이 되는 날을 위해 묵묵히 준비했지요.
저는 남편 이름으로 클래식 음반을 꼭 내고 싶었습니다. 고급스러운 재킷 디자인, 세련된 프로필 사진, 도톰한 네이비톤 속지 위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정갈히 정리된 곡 목록까지. 솔직히 말하면, 앨범을 만드는 목적이나 철학보다는 "남들도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의무감, '발매'라는 성취감에 더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꿈을 향해 달려가던 남편이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갈망하던 공연장 연주자 대기실이 아닌 대형병원의 신경과 진료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저명한 음악가와 협연 대신 재활치료사 선생님과의 일정을 조율하며,
어느새 우리 일상은 음악이 아닌 의학 용어로 채워졌습니다.
피아노 위엔 먼지가 쌓이고, 책상 위엔 악보대신 병원 진단서와 각종 서류가 놓였습니다.
무대 위 뜨거운 조명이 아닌 MRI 기계의 차가운 불빛이 남편의 얼굴을 비추었고,
클래식 음반 대신, MRI CD들이 하나둘 쌓여갔습니다.
투명한 CD케이스 속엔 내가 그리던 드라마틱한 남편의 목소리가 아닌,
뿌옇게 지워진 혈관과 침묵하는 뇌의 이미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가 꿈꾸던 일들과 너무나 상반되는 현실 앞에서 제 희망도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었습니다.
수유동과 양평, 가평을 오가며 재활에 매진하는 사이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하늘이 주신 기회라 확신합니다- 서울의 한 교회에서 정말 용기 내어 찬양과 간증을 했습니다. 그 계기로 지금까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 찬양을 하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 위로받고 언어도 마음도 치유되어 ‘음악가의 삶’을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노래는 부를 수 있지만, 언어도 움직임도 감정 표현도 사라져 버린 어린아이로 돌아간 남편을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했습니다. 눈물과 기도, 그리고 남편에 대한 믿음.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향한 신뢰가 우리 안에 있었기에 다시 악보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단어 하나, 음 하나, 몸짓, 표정 하나씩 처음부터 차근차근 함께 공부했습니다. 절망이 마음을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희망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많은 분들의 뜨거운 기도와 기다림의 끝에 남편은 2025년 2월 26일, 롯데콘서트홀의 화려한 무대에 다시 섰습니다.
무대 뒤에서 남편을 바라보던 저는 불안과 설렘, 감격과 걱정이 뒤섞인 감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첫 발표회에 나간 어린 자녀를 바라보는 엄마처럼요.
'혹시라도 누군가 남편의 어색한 동작이나 부자연스러운 몸짓을 눈치채진 않을까...
가사를 외우는 그 불가능한 영역에 우린 피나는 노력으로 도전했는데, 혹시라도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지?' 마음이 터질 듯 조였습니다.
"잘할 수 있어! 무대 위애선 당신이 주인공이야. 자신 있게 소리 내면 돼! 자기는 할 수 있어!!"
한 달 동안 두 아이는 아빠를 'Zeta 님'(극 중 배역)으로 불렀고, 가족 모두가 함께 그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힘들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퍼즐 조각은 김학남 선생님 기념 음악회라는 큰판에 무사히 끼워졌습니다. 특히 함께한 선후배 음악가들의 진심 어린 응원이 더해진 그날의 무대는 우리에겐 기적이었습니다.
사랑과 인내, 믿음으로 완성된 기적의 무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무대의 크기’나 ‘음반의 외형’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음악과 이야기로 공감과 위로,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둥지 밖이 두려웠던 저도, 이제 세상 앞에 서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브런치 작가님들 위로와 사랑이 제겐 세상으로 이끌어준 손길이 돼주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 연주 소식은 미리 알려드릴게요. 브런치 작가님들과 꼭 대면해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분들께 우리의 이야기가, 그리고 남편의 노래가 따뜻한 포옹이 되어드릴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P.S. 이 글은 특별히 HJ님께 드리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