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유럽에서 평등주의가 대두되면서 남성들은 당황스러운 딜레마를 마주하게 되었다. 새로운 원칙은 모든 인간(남자와 여자 모두)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여자가 하급의 역할을 수행하던 기존의 사회질서를 위협했다. 평등이 사회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무엇보다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은 여성들이 더 이상 남성에게 복종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17쪽)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가 다르다고,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남녀 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려는 이 모든 노력은 남녀 간에는 ‘유의미한’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고, 고로 남녀가 다르고, 따라서 역할이 다르고, 각자의 뇌와 신체와 역할에 맡는 일을 할 때 제일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타고난 본성, 명확한 차이. 남자의 자리, 여자의 자리. 그에 따른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실험 결과를 조작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결과만을 부각시키는 과학자들이 존재했고, 현재도 존재한다. 남녀 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런 사람들이 과학 특별히 진화심리학, 인지심리학의 주류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저자처럼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도 과학계에서 극소수일 것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주류 과학자들이 자신의 판단을 ‘가치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인간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내 ‘생각’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고, 내 것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 또한 밖에서 주어진 경우가 많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하게 중립적일 수 없으며, 과학적 도구와 방법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이 ‘중립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나 역시 젠더와 성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방식들 가운데 특정 부분을 선택적으로 보고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처럼 내 동기도 이념적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내가 객관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생각조차 박해받지 않고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니 남성의 공격성과 여성의 조신함을 기본축으로 하는 성 문화를 예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단 이러한 예찬이 과학적으로 정당하다는 말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마리루티, 35쪽)
마리 루티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부 과학자들은 실험 결과 중 일부만을 강조하고, 이는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가 다르다’는 통념을 뒷받침할 뿐이고, 이전 사회에서 ‘본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남녀의 역할과 능력에 대한 판단이 이제는 ‘과학’의 이름으로 더 많은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김대식 카이스트대 교수는 성장 배경이 흥미롭고 다루는 주제도 관심이 있는 분야라 강의 몇 개를 찾아들었다. 사진은 방송 화면을 캡처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뇌과학에 대해 1도 모르는 내가 한마디 하자면, 남자들이 비교적 남자의 표정은 그런대로 읽어내고, 여자의 표정은 잘 파악하지 못하는 데 반해, 여자들이 남자와 여자의 표정을 모두 잘 읽어내는 것은, 여자들의 공감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여자들이 가정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사회에서 ‘남자’의 권력 하에서 ‘남자’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이 그녀들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정을 살펴야만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공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공감 능력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 있고, 무심한 여성이 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남성이 있고, 무심한 남성이 있다. 남성을 집단으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관찰했을 때, 이 결과가 여성 개인의 결과와 ‘유의미한’ 정도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뇌 과학자, 전문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 버리는 평범한 우리들은, 쉬운 결론에 쉽게 도달한다. 그래, 남자랑 여자는 달라. 남자들은 감정에 무심하지. 여자들이 공감을 잘해. 다시 말하지만, 공감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공감했던 것이다.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으로 근대 철학에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온 영장류 생물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1970년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동물 행동을 기술하는 과학자의 언어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으로 당시 학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연과학의 언어는 그 사회의 정치, 사회문화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중립적인 학문은 없다는 주장이 생물학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해러웨이는 세계적인 석학이지만, 자연과학자들의 중립적 보편적 주체라는 자기 환상은 여전하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 123쪽)
흑인은 인간과 동물의 중간 형태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흑인이 백인과 다르다는 ‘과학적’ 주장 이면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는 크게 다르지 않다. 평균적 차이는 작고, 성별 간 겹치는 부분은 상당히 크다. 철수와 내가, 영희랑 나보다 더 비슷하고 더 가까울 수 있다. 아, 철수는 아니구나. 철수하고는 좀 많이 먼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