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꾸미지 않을 자유


 

 

예전에 엄마 세대를 중심으로 알음알음 전해지던 과격한 ‘눈썹 문신’은 한껏 진화해, 요즘에는 주위의 여성들도 자연스러운 색상의 예쁜 눈썹 문신을 많이 하는데, 추천의 시작은 ‘참, 편해’이다. 급기야는 짱구 눈썹으로 무장한 딸애게조차 눈썹 문신을 권한다. 쟤도 해줘.하면 얼마나 편한데. 요즘 유행에 맞춰 해준다니까. 

 

 

친하기는 하지만 친구는 아닌 지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난데없이 쌍꺼풀 수술을 고백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8명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 쌍꺼풀 수술을 안 한 사람이 딱 한 명, 나였다. 7명은 “너도 수술한 거였어?”를 서로 묻기 바빴는데, 수술 시기, 수술법, 눈의 형태, 수술한 후의 얼굴 변화에 따라 쌍꺼풀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불현듯 이렇게 획일화된 쌍꺼풀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나 같은 무쌍이 더 특별하지 않나 생각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저자가, 역시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책에서 말했더랬지. 곧, 가난한 사람들만이 성형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여름옷이 많다. 여름을 좋아하고 여름옷을 좋아한다. 여름옷은 가볍고 세탁이 쉽고 저렴하다. 부담 없이 여름옷을 산다. 대신 겨울에는 거의 교복 수준이다. 청바지에 티만 바꿔 입는다. 이번 여름을 맞이하면서, 힘들었던 나를 위로하는(?) 마음에 인터넷 쇼핑을 많이 했다. 특히 원피스를 많이 샀다. 원피스는 시원하고 체형을 가려주고 하나 값으로 한 벌이 완성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자꾸 드레스 같은 원피스를 찾고 있는 나를 본다. 자꾸 원피스를 산다. 

 

 

 

 

 

탈코르셋 운동은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지각판을 습곡, 침강, 단절시킬 수 있는, 맨틀과도 같은 미규정적이며 상이한 강도를 지닌 역량들의 다발체로서의 페미니스트 다중의 봉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6쪽) 

 

 

달리 말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연적으로 여성-신체자원이라는 ‘천연적 노동 대상물’을 타고났으며 이를 보다 세련되게 관리하고 정교히 세공해내는 기술을 투입함으로써 스스로의 신체를 ‘가공된 노동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꾸밈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33쪽) 

 

 

 

 

탈코르셋 운동은 왜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인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신체’에 갇혀있다. 여성은 사람은 아니라, 여성이다. 남성이 인간의 표준이고 기준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혹은 ‘감히 여자가’, ‘어떻게 여자가’라고 시작되는 모든 언설은 ‘어떠해야 한다고 이미 규정되어 있는 여성의 표준’을 전제로 한다. 그중에서 여성을 여성으로 제약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다시 말해 여성을 남성이 아닌 여성이 되게 하는 차별점이 바로 ‘몸’이다. 따라서, 여성-신체 자원을 타고난 여성은 화장, 다이어트, 성형 등의 꾸밈 노동과 애교 섞인 말투, 순종적인 자세 등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가공된 노동 대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를 거부하거나 반항할 경우, 강력한 비난에 직면한다. 아니, 무슨 여자가 저렇게 많이 먹어. 아니, 무슨 여자가 화장도 안 해. 아니, 무슨 여자가 저렇게 목소리가 커. 

 

 

 

 

화장이나 외모 꾸미기에 대한 여성들의 취향이나 관심,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인형이나 분홍색에 대한 선호, 나긋나긋한 말투나 수동적 태도 등은 여성에게 각인된 ‘아비투스’(habitus)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비투스란 사회적으로 범주화된 계층적 가치가 육체에 각인된 상태로서,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층성을 온전히 체현한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위하고 무언가를 선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화장과 같은 꾸밈 노동을 여성 개인의 사적인 취향이나 기호로 오인하도록 만드는 구조야말로 성별 계층성에 의해 도식화된 개인의 행동 패턴과 특정 라이프스타일의 재생산 효과가 얼마나 한 개인의 신체와 사고방식에 온전히 침습되어 있는가를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74쪽) 

 

 

 

여성이 하나의 단일한 계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비투스 이념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범주화된 계층적 가치가 육체에 각인되어, 성별 계층성에 의해 도식화되는 것. 즉, 같은 조건의 남성에게는 요구되지 않거나 요구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조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이름 붙이는 계층 전체에. 예를 들자면. 

 

 

 

 

최근 충남의 한 카페에서는 여성 아르바이트생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부당한 일이 있었다.

 

변호사 같은 전문직 여성도 예외는 아니다. 이른바 ‘접견 전문 변호사’ 문제이다. 변호사 접견이 잡히면 구치소 수감자는 좁은 감방에서 벗어나 횟수·시간제한 없이 접견실에 머물 수 있다. 이 점을 이용해, ‘접견 전문 변호사’는 부유한 남성 수감자의 심부름꾼·말동무가 되는 대신에 시간당 30만~300만 원을 받는다. 그래서 일부 로펌은 젊은 신규 여성 변호사를 부유한 남성 수감자를 위한 ‘접견 전문 변호사’로 채용하고, 신체 치수와 사진을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노동자연대,  268호,  2018-11-28> 

 

 

 

예전에 백화점 판매직 여성들에게 강요되던 화장 강요 및 안경 착용 금지가 이제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여성 아르바이트생에까지 확대되었다. 변호사라는 ‘전문직’ 여성이어도 ‘예쁘고 단정한’ 용모를 요구받는다. 참고사항 정도가 아니다. 신체 치수와 사진으로 증명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성 과잉 전시 행위는 지극히 정상이라 여겨지는 반면, 그 강요된 여성성과 다른 방향의 모습들을 전시하는 행위는 폭력적이고 과격한 것들로 해석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와 같은 실천 행위들은 사회가 요구하지 않는 가치체계를 여성들이 재현하는 모습을 통해 반감과 반발심을 불러옴과 더불어 두려움, 체제전복의 공포감, 혁명의 가능성이라는 정동 또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46쪽) 

 

 

 

 

우리 사회의 여성성 전시가 얼마나 과한지는, 5살 여아의 옷만 봐도 알 수 있다. 5살 여아들이 얼음공주 엘사와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 엘사와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드레스를 입고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물론 알고 있다. 다만, 5살 여아에게 그대로 늘여서 입으면 엄마가 입어도 될 만큼 여성스러운 옷을 입히고, 불편하고 답답한 검정, 빨강, 분홍 구두를 신겼을 때, 그리고 그 모습이 예쁘다고 두 손 모아 손뼉 칠 때, 우리 사회는 여성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가진 건 아닌가, 너무 여성성 충만한 세상 아닌가, 하는 의문 정도는 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머리를 샴푸하고 말리는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긴 머리를 짧게 자른다. 

30분 혹은 40분, 화장하는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민낯으로 외출을 한다. 

여성스러운 체형으로 보정하기 위해 몸을 옥죄는 불편한 옷 대신 편안하고 튼튼한 옷을 입기로 한다.

 

 

여기, 어느 지점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면이 있나. 여기, 어느 지점에 남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지점이 있나. 여성의 <탈코르셋 선언> 어디에, 반사회적, 반공동체적 영향이 존재하는가. 

이전 05화 현관문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는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