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의 배꼽이라 불릴 정도로 내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후라노. 이곳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여름철 홋카이도를 보랏빛으로 물들게 만드는 라벤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라벤더가 기차역을 만들었다 없앴다 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차역은 한 번 만들면 그 시설을 옮기거나 해체해서 다시 만들거나 하기가 쉽지가 않다. 궤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철도가 한 번 만들어지면 폐선되지 않는 한 오랫동안 유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후라노에는 상상 외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후라노선과 라벤더바타케역 위치.
홋카이도 노선 가운데 가장 내륙에 자리한 후라노선은 아사히카와역과 후라노역을 이어주는 짧은 노선이다. 다른 노선들은 바다에 근접해서 이어지거나 해안가에 최대한 가까워지는데 후라노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다와 거리가 멀다. 이 노선 가운데서도 내륙 중심부에 자리한 역이 바로 라벤더바타케역이다. 우리말로 라벤더 밭이라는 뜻의 라벤더바타케역은 후라노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임시역이다.
임시역이라 하면 항상 있는 역과 달리, 특정 기간에만 운영하는 역을 뜻하는데, 일본에는 라벤더바타케역과 같은 임시역을 간혹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라벤더바타케역은 항상 운영할 것 같은 기차역도 시기에 맞춰 유연하게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임시역으로 운영 중인 라벤더바타케역(좌), 휴업 중인 라벤더바타케역(우)
라벤더 꽃이 필 무렵인 6~7월의 라벤더바타케역은 승강장은 하나에 불과하지만 같은 노선에 비슷한 규모의 역이 많아서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봄에 담은 라벤더바타케역은 승강장과 도로를 잇는 통로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 승강장은 보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승강장은 해체되어서 보관 중이었다. 아무래도 임시로 운영하는 역이다 보니,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라벤더가 필 무렵에만 역으로써 기능을 하는 라벤더바타케역.
그렇게 해체가 된 역은 흔적만 남겨놓은 채 깊은 잠에 빠져있다. 마치 장기 주차한 차량에 덮개를 씌워 보호하는 것처럼, 라벤더바타케역의 승강장이 되는 구조물들은 파란 천에 싸여서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니 열차에 타고 있을 때는 이곳에 역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통과해버린 것이다.
평상시 열차들은 역이 없는 것처럼 이곳을 그냥 통과한다.
도로와 연결된 통로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주의 표지판과 함께 막아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을 지나는 열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버리고 있다. 보통열차는 있는 역 모두 정차하지만 후라노선의 보통열차는 라벤더바타케역이 운영할 때나 운영하지 않을 때나 일관성 있게 통과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가설치를 위해 보관 중인 자재들.
보관의 용이성을 위해 해체한 것처럼 보였던 라벤더바타케역. 이곳에 역이 설치되어 운영할 때도 정차하는 열차는 임시로 운영하는 '후라노*비에이 노롯코호'라 불리는 시즌 한정 열차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라벤더바타케역은 후라노*비에이 노롯코호가 운행하지 않을 때는 역으로써 기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라벤더바타케역에 유일하게 정차하는 '후라노*비에이 노롯코호'
외관부터 눈에 띄는 후라노*비에이 노롯코호는 홋카이도의 몇 안 되는 관광열차다. 이 열차가 보통열차도 정차하지 않는 라벤더바타케역에 정차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홋카이도의 라벤더를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팜 도미타'가 라벤더바타케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벤더를 구경하려고 하는 승객들이 어떻게 하면 팜 도미타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임시역과 임시열차라는 독특한 방식의 운영 구조를 창안했다고 볼 수 있다. 라벤더바타케역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팜 도미타가 운영되어야 하는데, 라벤더 시즌이 아니면 팜 도미타도 휴업을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라벤더바타케역도 휴업을 할 수밖에 없고, 라벤더 시즌에만 운영해야 한정판으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후라노*비에이 노롯코호도 운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임시역이라는 독특한 구조의 역이 탄생한 라벤더바타케역. 거기에 맞춰 접근성을 무기로 승객을 유인한 후라노*비에이 노롯코호. 열차와 역의 도움으로 관광객들에게 더 가까워진 팜 도미타까지. 기존 상식만 조금 벗어난다면 얼마든지 지역 상생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열차에서 바라본 라벤더바타케역.
마을이라고는 저만치 멀리 어렴풋이 보일 뿐인 데다가 드넓은 밭이 펼쳐져 있는 이곳. 역이 있기에는 너무도 어색한 위치지만 이곳에는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곳은 일정 기간에만 특별한 열차와 함께 우리에게 개방될 뿐이다. 그 기간이 아닐 때 이곳을 지나면 마치 승객이 없어서 폐역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역으로 생각하기 쉽게 되어있다.
라벤더바타케역의 역명판.
특정 기간에만 얼굴을 비추는 라벤더바타케역의 역명판. 그래서 인근 역의 역명판과 달리 화려한 라벤더 밭이 배경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역 이름에는 임시(臨)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영어로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스페셜이 적혀있는데, 항상 볼 수 없는 이 역이야말로 진정한 스페셜이 아닐까 싶다.
라벤더바타케역의 인근역들. 역명판에 라벤더바타케는 적혀있지 않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인근 역들은 라벤더바타케역 표기를 볼 수 없다. 역 번호는 라벤더바타케역을 위해 비워놓았지만, 이는 마치 폐역 처리가 되어 결번 처리된 다른 노선의 역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보통열차는 이 역명판대로 라벤더바타케역이 아니라 인근 역인 두 역에 차례로 정차한다.
p. s. 우리나라도 마음만 먹으면 라벤더바타케역처럼 활용할 수 있는 역을 꽤 많이 만들 수 있다. 대표적인 역으로 진해선의 경화역이 있다. 지금은 창원으로 통합되었지만, 진해에는 군항제라는 상당히 큰 행사가 열린다. 그 행사는 벚꽃이 필 무렵 시작되는데, 그 시기에 경화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으로 바뀐다.
당연히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경화역은 폐역 처리된 지 오래라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한때 경화역에 열차가 임시로 정차는 했었으나, 그마저도 없어진 지 오래다. 왜 일본은 되는데 우리나라는 안 되는 것일까? 라벤더바타케역과 후라노*비에이 노롯코호 그리고 팜 도미타의 절묘한 상관관계처럼 경화역과 경화역에 정차하는 특별열차 그리고 진해 군항제의 관계를 기대할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