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후의 이야기 #4
“형은 정말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 어떤 이의 질문에 대한 동생의 대답
서울대학교병원 암병동 병실에서 아직 치료중이던 나날들 가운데 하루. 돌고래와 꼬지가 문병을 왔던 날이었다. 걔들이 아마 두 번째로 병원을 찾아 주었던, 그러니까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이야기하자’며 나를 데리고 나가 병원 앞뜰에서 이야기를 나눴다는(11화 ‘문병을 와 주었던 고마운 친구들에게’ 참고) 그 날. 이야기를 마치고 어디 놀러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돌아오고 있는데 복도 멀리 병실 문 한켠으로 빼꼼, 장난기 어린 얼굴 하나가 보였다. 내 동생 재훈이의 얼굴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두 살 어린 남동생과 싸웠던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나는 지금껏 동생과 싸워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어쩜 그렇게나 형제간 사이가 좋았던 건지, 어릴 적 할머니께서 “쟤들은 뭐가 좋다고 저렇게 둘이 붙어다닌대니?”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언제나 유쾌하고 장난기 넘치고 함께 있으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성격의 내 동생. 나는 그런 내 동생이 참 좋다.
동생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을 능숙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돌이켜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하는데, 초등학교 시절 엄마 아빠 나 그리고 동생 이렇게 우리 네 가족이 할머니 댁으로부터 독립해 나와 살던, 에메랄드빛 연립 주택에서의 일이다.
열 평 남짓 됐으려나? ‘방-부엌-방’으로 이어지던 세 칸짜리(화장실은 집 밖에 딸려 있던) 작은 집 안방에서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면 말리러 가는 건 언제나 동생이었다. 내가 3~4학년 때였으니 동생은 아마 초등학교 1~2학년 즈음이었겠지. 한밤중 부부싸움 소리가 들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난 동생은 부엌을 건너 안방으로 가 엄마 아빠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괜찮다며 동생을 달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나는 그저 베개로 귀를 꽉 막은 채 누워있기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 집은 왜 이런 걸까?’하는 생각을 주워 삼키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성적이라는, 인간을 평가하는 소소하고 별반 중요치 않은 수치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내 동생은 나보다 낫다. 그런 동생에게서 가장 닮고 싶은 부분을 꼽자면 바로 그 ‘삶의 능숙함’을 들겠다.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끝없는 준비를 해야 하고 그러한 준비를 통해 간신히 살아나갈 수 있을 뿐인 삶을, 동생은 아무런 의식적 준비나 부담 없이도 능숙하고 또 탁월하게 살아 나간다. 내가 봐 온 동생은 언제나 그랬다.
언젠가의 여름, 동생이 큰삼촌의 낡은 자전거를 빌려 친구와 둘이서 국토종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내심 놀란 적이 있다. 자전거로 전국을 달리며 고생할 결심을 했다는 것에서 놀란 게 아니라, 무슨 거창한 목적이나 이유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전거로 달려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 자체가 (꽉 막힌 내 사고 하에서는) 놀랍기만 했던 거였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에서 계속해 페달을 굴리고 날이 저물면 어디든 그곳에서 묵고 어떤 날은 근처 교회 목사님께 부탁을 드려 교회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이튿날 아침 젊은 친구들이 고생한다며 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목사님이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는 동생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역시나 내 동생이 나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출발 전 목적지로 삼았던 곳에 도달한 동생은 별다른 머뭇댐도 없이, 그저 자전거를 택배로 집에 부치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어 있기라도 하다는 듯 한참이나 자연스럽게.
어쩌면 동생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중에서 삶을 가장 솜씨 좋게 살아 나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이고 아빠도 엄마도 동생만큼 삶을 노련하게 살아 내지 못한다. 그처럼 능숙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동생. 나는 그런 내 동생이 참 좋다.
‘너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고등학교는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게 좋겠다’라는 엄마의 말에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 2주마다 한 번씩 다녀왔던 집에서 나는 종종 동생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곤 했다. 이것 역시 정말인데, 그렇게 함께 자는 것은 언제나 동생의 요구에서였다. 형과 함께 이야기하다 자고 싶다 하는 동생의 요구. 나도 뭐 싫을 건 없었으므로 동의했던 거였고. 침대에 누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떠오르는 건 동생과 한 차례씩 번갈아가며 자동차 이름 대기 게임을 했던 기억. 그러니까 동생이 “쏘나타”하면 내가 “그랜저”하고. 그랬다는 얘기다. 그렇게 한 차례씩 이름을 대다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으면 그제서야 잠이 들곤 했다. 함께 침대에 누운 채 포근한 기분으로 스르르.
-
제대하고 집으로 온 내가 방에 틀어박혀 지겹도록 잠만 자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우리 집 분위기는 정말로 말이 아니었다. 전까지 제 할 일 스스로 잘하기만 하던 내가 그저 잠을 자는 것밖에는 하는 일이 없었으니 부모님은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또 걱정 많은 아빠는 엄마를 얼마나 닦달했을까. ‘대훈이가 이상해진 것 같으니 어떻게든 해 보라’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자는 말에도 복학하면 괜찮아질 거라며 거부하는 나를 보다 못한 부모님은 답답한 마음에 굿까지 했을 정도라니 집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광활한 대양의 깊고 깊은 물 아래로 침몰한 19세기의 유람선처럼,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있었던 그 시기의 우리 집. 나보다 1년 늦게 군대에 갔던 동생이 제대한 시기가 하필이면 그즈음이었다. 언젠가 동생이 나에게 들려줬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자신의 제대 무렵, 부모님의 기꺼운 환대를 당연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집에 와 보니 형의 상태 이상으로 반갑고 자시고를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한없이 어두운 집의 분위기에 동생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어두컴컴한 집의 좁은 방에서 잠만 자는 형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랬을 동생의 마음이 떠오를 때면 언제나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다.
시달리던 수면 과잉의 이유가 뇌종양 때문이었다는 진단을 받고 다행스럽게 치료를 마친 뒤 후유증과 함께 복학해 학교에 다니던 때. 울리는 전화에 아빠 이름이 보이면 휴대폰을 그저 덮어두곤 할 때가 있었다. 아빠가 분명히 물어 올 “그래, 넌 요즘 뭐 하고 있니?”하는 질문이 싫었던 마음에 그랬다. 아빠가 생각하고 있을 내가 해야 할 일들, 다시 말해 영어 공부라든가 자격증 공부라든가 또는 대학 입학 무렵부터 아빠가 줄곧 얘기해 온 공무원 시험공부 따위를 그때의 나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따지고 본다면 아빠의 그런 요구 혹은 독촉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 치료를 마치고 병원에서 퇴원한 당시 20대 후반의 내 나이. 내 방값이며 생활비를 언제까지고 아빠가 지원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얼마 만에 돌아온 것인지 모를 정상적인 컨디션에 행복해하며 나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열심히 책을 읽고 열심히 생각하고 또 하루 몇 시간씩 글을 적으면서. 그런데 요즘 뭐 하고 있냐는 아빠에게 ‘전 요즘 책 읽고 글 쓰고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그랬다면 아빠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좋은 반응을 기대하긴 아마 힘들었을 테지.
내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챈 아빠는 내 대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 요즘 뭐 하고 있니?”하고 물어보려고. 아빠가 그런 물음을 전할 수 있을 만큼 동생과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던 그 무렵,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동생은 나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형, 형이 고등학교 때까지 아니 군대에 있을 때까지 아빠가 형한테 뭘 하라고 시키거나 형을 걱정하거나 형한테 뭐 하냐고 물어본 적 있어? 한 번도 없었잖아. 아빠는 형을 정말로 신뢰하고 있었단 말야. 그때까지 형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잘했으니까. 그런데 어땠어? 형이 병신 됐을 때, 집에 와서 병신같이 잠만 자기만 할 때, 그런 형을 보는 아빠 기분이 어땠겠느냔 말이야. 아빠는 정말로 놀랐던 거야. 그런 모습의 형을 본 건 처음이었을 테니까. 아빠는 형을 그때부터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동생의 말처럼 아마 그때부터였지 싶다, 아빠와 엄마가 나보다 동생에게 더 의지하게 되었던 때가. 장남인 나보다 동생을 더 신뢰하게 되었던 때가.
그런데, 돌이켜 떠올려 보면 그것도 꼭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마음을 기대고 또 의지하는 장남의 역할을 동생과 나눠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도 장남으로서의 부담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기도 하고. 형이 꼭 형일 이유가, 그렇다고 동생이 꼭 동생일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쩌면 그때부터 엄마 아빠뿐 아니라 동생의 마음에도 아픈(혹은 아팠던) 형을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
첫 면접을 앞두고였을까? 아니면 인턴 준비하던 때?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운동화만 신던 내가 사회 진출을 준비하며 처음으로 구두를 구입하러 갔던 날이었다. 동생과 함께 갔던 아웃렛 매장에서 동생은 내 구두를 신경 써 골라 줬고(형, 이 디자인이 나아보여) 구두 가게 직원에게 역시나 능숙한 태도로, 형의 키가 더 커 보일 수 있도록 키높이 밑창을 깔아 달라는 말을 전했다. 동생 옆에 서서 그런 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나를 챙겨 주는 동생이 살짝 아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은 왜 그렇게 자꾸 나에게 선물해 주는 걸까? 나는 동생에게 뭘 사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맨 처음 동생이 나에게 선물해 줬던 건 뉴발란스993 운동화였다. 튼튼해 아직도 신고 다니는 993을, 동생은 발볼이 넓은 형에게 잘 맞을 것 같다며 선물해 줬다. 또 (이건 사준 건 아니긴 하지만) 피처폰을 사용하던 나를 위해 저렴한 판매점을 알아 봐 함께 스마트폰을 구입하러 가 줬던 것 역시 동생이었다. 이후 동생은 나에게 에어팟이며 애플와치와 같은 여러 전자제품과 옷들을 선물해 주곤 한다. 그저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마치 사회에 먼저 진출한 손위 형이나 오빠가 동생들에게 그래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매번 ‘고마워, 그런데 안 사줘도 돼’라 말해도 동생은 언제나 그런다.
지금껏 동생과 싸운 적 없었다는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내 성격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던 건지, 한 가지 짐작되는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아빠와 아빠의 동생들인 삼촌들과의 관계다. 장남인 우리 아빠는 삼촌들과의 관계가 썩 좋지 못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요즘에는 얼굴 볼 일 없으니 싸울 일도 없지만 예전엔 삼촌들과 정말 많이 싸웠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아빠와 삼촌들의 관계를 보며, 그리고 그런 모습에 속상해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알게 모르게 ‘나는 동생과 진짜진짜 친하게 지내야지, 그래서 엄마 아빠 마음 아프지 않게 해야지’ 하는 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한참 전에, 그러니까 치료를 마치고 동생과 함께 살던 때에 아는 사람과 나 그리고 동생 이렇게 셋이서 술자리를 가졌던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는 이가 동생에게 물었다. “형(나)은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하고. 술기운이 좀 오른 듯한 목소리로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형은 정말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그건 동생으로부터 처음으로 들은, 나에 대한 평가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동생의 그 대답이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술자리를 마치고 함께 지내던 방으로 돌아가던 길. 언제나처럼 동생은 또 한 번 유머러스한 멘트를 던졌고 나는 한참이나 웃었다. 배를 잡고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동생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그 길 위의 시간으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언제나 유쾌하고 장난기 넘치고 함께 있으면 언제나 웃게 해 주는 내 동생. 그리고 때론 듬직한 형 같은, 그래서 나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 내 동생 재훈이가 나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