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후의 이야기 #6
한여름,
맥문동의 계절
아주 오래전, 필리핀에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엄마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한 개 받았다 : [따가이따이활화산말타고가는거야]
엄마의 문자에 나는 답문을 보냈다 : [말타고 활화산 올라가고 있다고?]
엄마의 재 답문 : [지금은 거느타고가는중]
‘거느? 뭔가 필리핀에서 가마 비슷한 거라도 타는 건가?’하는 생각이 담긴 내 답문 : [거느가 뭔데?]
엄마 : [미안 버스ㅋㅋ]
다음 날 아침, 엄마는 문자를 한 개 또 보냈다 : [소원을빈다는팍상한폭포가는중 노젓는배타고간대]
나의 답문 : [오 노젓는 배 재밌겠는데? 거긴 날씨도 좋나?]
엄마의 말 : [좋네 밀라노에서남부로두시간반가야해]
‘필리핀이 유럽이랑 그렇게 가깝나?’ 하는 생각에 내가 보낸 문자 : [또 웬 밀라노? 밀라노는 이탈리아 아냐?]
엄마 : [아하 마닐라]
얼마 전의 일요일, 너무나 좋은 날씨에 집에서 가만 앉아 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운 수목원에 갔었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다가 한 켠 화단에 그저 평범하지만 왠지 낯익어 보이는 풀이 있길래 혹시나 하고 가서 들여다보았더니 역시나, 풀 옆에 꽂혀 있는 작은 팻말로부터 꽃의 이름이 보였다.
<맥문동(麥門冬) Liriope platyphylla>
항암치료를 마치고 서울에서 엄마와 함께 살던 무렵 같이 산책 나갔던 학교의 교정에서, 주말이면 가곤 했던 개운산 근린공원에서, 팔짱 끼고 올라가던 남산타워 길에서, 그리고 종종 산책갔던 학교 근처 홍릉수목원에서 엄마가 항상 감탄사를 앞세우며 가리켰던 보라색 꽃. 엄마가 고향 집으로 내려간 뒤 내가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엄마에게 ‘이 꽃 이름이 뭐였지?’ 하고 문자를 보내자 ‘아!!! 맥문동이네’하고 느낌표를 세 개나 찍어 답장을 보내왔던 바로 그 꽃, 맥문동이었다.
아직 초봄이라서 그런지 꽃이 맺히지 않은, 꽃의 이파리라고 하기도 뭐한 그 평범하기만 한 풀을 보고 있자니 ‘이런 풀에 그렇게나 아름다운 보라색 꽃들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겠어?’라는 생각이 들다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 이어져 엄마와 같이 살 때 내가 만들어주었던 엄마의 이메일 주소를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구나, 하는 후회 섞인 마음도 괜스레 피어올랐다.
서울에서 살 때 엄마는 나와 동생이 학교에 가 있는 낮 시간 동안 요양보호사 일을 나가셨다. 고향에서도 나가시던 일을 서울에 올라와서까지 또 찾아서 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고향의 공공기관에서 240시간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서 나가는 일이었는데도 엄마는 부끄러워하며 그냥 남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엄마가 요양보호사 일을 한다는 게 나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 없었는데 말이다. 서울에서는 요양보호사 일을 하려면 이메일 주소가 필요하더라고 엄마는 나에게 이메일 주소를 하나 만들어 달라셨다. 엄마의 말에 나는 피곤해하고 귀찮아하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그저 엄마의 이름 이니셜과 생년을 따 이메일 주소를 만들고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그냥 그렇게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을 이메일인데 컴퓨터와 별반 친하지도 않은 엄마가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자 하는, 핑계 같지도 않은 핑계를 마음속으로 주워 삼키며 말이다. 그랬던 게 지금 왜 그렇게나 후회가 되고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지. 엄마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라도 이메일 주소에 넣어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엄마도 더 좋아했을 걸….
엄마와 함께 지내던 방에서 아직 잠은 완전히 깨지 못하고 얼핏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면 엄마는 항상 눈을 뜬 채 가만히 누워 천장만, 온통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렇게 뜨고 있는 엄마의 눈이 슬퍼보였다. 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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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쁜 우리 엄마.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엄마의 예쁨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던 나는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의 엄마 얼굴을 보곤 ‘왜 저렇게 안 예쁜 배우에게 장그래의 엄마 역할을 맡긴 거지?’ 하는 위화감에 한동안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정말 할머니가 되어 점점 더 노쇠해 간다면 나는 얼마나 슬플까. 언젠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엄마는 할머니 돼도 머리 뽀글뽀글하게 파마하지 마” 내 말에 엄마는 “그래, 아들이 하지 말라면 안 할게”라고 대답해 주었다.
언제나 예쁜 우리 엄마. 누군가들과 만나 ‘우리 엄마예요’라고 소개하면 다들 내게 어머니가 정말 예쁘시다고 말하고 나는 그게 그냥 하는 인사치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엄마의 겉만 보고 판단해 말하는 것일 테다. 정말이지 엄마는 예쁘다. 우리 아빠에게 시집을 온 게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아까운 건 단지 엄마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다. 아까운 이유를 여기에 다 적기에는 페이지가 너무나 부족하기만 하니 이쯤에서 줄이겠지만 대표적인 이유 하나만 말해보자면, 엄마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엄마는 친구도 많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무척 좋다. 물론 내가 볼 때 그렇다는 말이지만 아들이 볼 때 그런 티가 날 정도면 오죽할까? 엄마는 중고등학교 동창들인 남자(사람)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데, 엄마 말로는 “걔들(남자 친구들)은 다 나를 무서워해”라고 그런다. 나도 엄마와 같이 살 때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에서 남자 동창들과 통화하는 엄마의 말투를 듣고는 엄마의 말이 정말이겠구나 싶어 엄마의 말을 믿기로 했다.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엄마의 모습이라니…. 왠지 엄마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이 그려진다. 활기 넘치고 한없이 긍정적이고 너무나도 사랑스럽기만 한 여학생, 그러나 세상 물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겉으로만 어른인 여자아이.
치료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해 서울에서 엄마와 같이 살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동생이 추천해 주었던 약학박사님의 지침에 따라서였다. 박사님이 말씀해 주신 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수칙은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고기 섭취가 별로 좋지 않다는 말씀이었다. 박사님의 말에 따르면 암 환자가 고기를 먹는 것은 암세포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또 완전한 치료와 회복을 위해 샐러드와 같은 야채 반찬을 많이 먹는 게 좋고 과자나 탄산음료 같은 군것질 금지.
말하자면 그 이유 때문에 엄마는 서울로 올라오셨다. 자취하는 아들이 꾸준히 해 먹기 어려운 야채 반찬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아픈 아들의 건강한 반찬을 만들어주기 위해 엄마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나와 함께 지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 그리고 동생과 함께 지내기로 말이다. 그렇게 함께 지낸 1년이라는 시간은 중학교 이후 집을 떠나 오랜 시간 혼자 지내며 온전히 ‘나’라는 개인으로서 살아가던 내가 ‘가족’이라는 집단으로 회귀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동생에게 힘든 내색 한 번 한 적 없는 엄마, 언제나 웃는 얼굴인 엄마,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늘 긍정적인 엄마, 잠결이면 발가락을 까딱거리는 습관이 있는(이건 같이 살면서 알게 됐다) 엄마.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맥문동처럼, 아무 말 없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로가 되어주는 우리 엄마.
지금에 와서 다시 엄마의 이메일 주소를 만든다면 엄마가 좋아하고 엄마를 상징할 수 있는 단어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겸손과 인내가 꽃말이라는 엄마가 좋아하는 꽃, 피기 전에는 그저 생생하기만 한 풀 같은 모습이지만 조용히 품고 있는 꽃이 핀 뒤에는 엄마처럼 아름다운 보라색 꽃잎을 자랑하는 꽃, 맥문동Liriope을 따서 말이다.
우리 엄마, 한현자는 그 꽃의 이름을 사용할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