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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즈 Sep 27. 2023

담을 넘어 출근

노동조합을 시작하다(1)

  "워킹맘"이라는 이름에 "노동조합 임원"라는 이름을 하나 더 붙이게 된 건 사실 엄청난 고민을 통해 결정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한마디     

  "너도 노조 할 거지?"     

  당시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 움직임이 있던 때, 후에 초대 위원장이 된 선배가 툭 던진 한마디에     

  "응, 그래야지. 뭐."라고 답한 게 그 시작이었다.     

  그렇게 노동조합을 시작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그 비슷한 성격의 집단에서 활동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     

  IMF 세대인 내가 다니던 대학 풍경은 각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컸다. 학교마다 활발하던 학생자치회는 쪼그라들어 운영이 쉽지 않았고, 당장 취업이 중요한 분위기에서 "데모", "운동권", "노동가요"는 자취를 감췄다. 대학의 낭만이라던 동아리들도 점점 실용적인 동아리만 살아남고 대학가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조용히 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게 맞다는 분위기라 집단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든가 하는 것 자체를 경험해 보질 못했다. 그런 사람이 노동조합. 그것도 간부라니.     

  예상에 없던 일이다.               

  당시의 개인적인 상황을 말하자면 큰아이는 3살. 아침에 제일 먼저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아이였다. 남편은 매일 야근에 주말도 하루는 출근하는 얼굴 보기 힘든 사람. 양가 부모님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5시간 떨어진 곳이라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다시 아이를 찾아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매일매일 워킹맘으로 살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잘 보내고 있음에 만족하고 자신을 스스로 대견해하며 살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한다는 것이 참 힘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다.      


  내가 혼자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결심에 누구도 의견을 내지 못했다.     

  결혼 후 원가족에게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고, 고향을 떠나오다 보니 이곳에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어떠한 인적 네트워크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지랖을 떨어줄 사람들이 곁이 없었다.     

  노동조합에 참여해서 활동한다고 해도 그저 나의 일상에 하나가 추가된 것일 뿐.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들의 동의를 구할 이유가 없었다.      

  워킹맘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아이는 어쩌고' 식의 말을 할 사람이 없으니 결정하기 쉬웠다. 먼발치서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주위의 누구도 나에게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 자신도 당당했다.      

  의외로 반대할 줄 알았던 남편은 딱히 별말이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사실 그러다가 말 줄 알았다고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다고 했다. 둘째를 낳고도 활동하니 그때야 대체 언제까지 하는 거야? 라고 물어봤었다. 그때도 나는 "뭐 그냥 하는 거지."라고 대답했었는데, 그것도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 채 살고 있다.     

  노동조합을 시작했을 때 3살이었던 큰아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뭐든 잘 먹고 카시트 안에서도 잘 자는 아이였다. 그 덕을 크게 본 것 같다. 조합 홍보를 위해 또는 다른 단체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러 학교를 방문할 때도 늘 함께 다녔다. 함께 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가서도 낯설어하지 않고 잘 놀았다. 식당 밥도 잘 먹고 간식도 잘 먹고 카시트에서 잠도 잘 잤다. 지금도 기억하는 장면은 모 중학교 다목적 강당에서 한참 설명하고 있던 때였다. 단상 위에서 말을 하던 나를 보고 "엄마!"라고 귀엽게 불렀던 순간과 그 목소리. 모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렇게 노동조합은 설립이 되었고 운영을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났었다. 당시 우리 집 거실은 공공의 것이었다.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한쪽에서는 가입원서를 정리해서 노트북으로 입력하고 한쪽에서는 노동조합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느라 바빴다.     

  노동조합을 시작했을 당시 간부진의 대부분은 8급에 삼십 대 초중반. 거기에 대부분이 여성. 누가 봐도 만만하게 보이는 위치였다. 사람들은 참 우리를 만만하게 대했다. 당시 나는 교육감 상대로 기능직 전환에 대한 소송을 진행 중이었기에 우리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가끔 전화를 받곤 했다. 대부분 네가 왜 대표성을 띠고 소송을 진행하냐는 화를 내는 내용이거나 법치 논리를 자기가 짜면 완벽한데 네가 하는 게 맞냐는 내용이었다. 법치 논리를 따지는 분에게는 당시 우리가 위임했던 법무법인을 연결해 드리거나 담당 변호사의 경력을 말하면 수그러들었다. 네가 왜 소송을 진행하느냐는 내용의 불만은 이 시기를 놓치면 소송을 통해 하위직급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메시지가 약해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전화 내용은 보통 지시 아닌 지시를 하기 위한 전화들이 많았다. 내가 멋진 정책을 구상해 놓았으니 한번 해보라는 내용. 그럴 때마다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면 그건 어렵다고 했다. 그냥 자신이 낸 아이디어 자체가 정말 괜찮으니 좀 구체화해서 진행해 보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래 그 정도는 이해해주려 했다. 그런 전화 대화 중에서 나를 가장 화나게 했던 것은 바로      

  "주무관님들은 맞벌이에 여자니까 노조 활동을 해도 괜찮잖아요. 남편분이 버시니까. 나는 내가 하다가 잘리면 어떻게 해요?"     

  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여러모로 화나는 내용들     


  신생 노조는 노조를 어떻게 꾸릴지도 모르고 사람도 부족했다. 여러 사람이 참여하겠다며 들어왔다 나갔다. 간부로 열심히 하겠다고 들어와서 본인이 위원장을 해서 권력과 이익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인적인 잇속을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는 사사로운 모임으로 대체하고 싶어 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실망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노조 구성원이 8, 9급이 대부분이라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학교의 주무관 모임 같이 보는 시선들이 많았었다. 

  노력해도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보수적인 공무원 집단 중에도 가장 보수적인 학교라는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색을 선뜻 드러내는 일은 자주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 위원장을 맡았던 선배는 스트레스와 개인적 이유로 몇 달을 하다 위원장직을 내려왔다, 그렇게 나는 임시위원장의 타이틀을 달았지만, 나머지 간부진과 공동 운영 형태로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은 즐거웠다.     

  수평적인 간부 형태로 운영되던 우리는 진정한 동료의 느낌이었다. 학교라는 구조상 한 학교에 3~5명 정도로 구성되고 그 안에서도 모두 층층이 나뉘어서 나랑 같은 위치의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하기란 쉽지 않다. 함께 웃고 떠들다가도 각자의 위치가 다르다 보니 미묘하게 견해차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외롭다는 것은 보통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구조인 학교에서 근무하다 조직에서 일을 하니 어렴풋이나마 동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뭐든 이야기해도 되고, 다른 이가 내 이야기에 동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 역시 자유롭게 반대하고 찬성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노조는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어가는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다른 노조와도 함께 만나 공동 대응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씩 노동조합 일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체력이 부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둘째를 임신하고 활동 중이었는데 도저히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둘째 임신 5개월쯤 공식적으로 모든 직에서 물러나서 평 노조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1년 뒤 복직과 함께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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