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비발디의 사계
어릴 적 읽었던 안데르센의 동화가 기억난다. 행색이 남루한 여인이 진짜 공주인지 알아보기 위해 침대 위에 완두콩을 올려두고 그 위로 매트리스 20장과 이불 20장을 올려놓고 하룻밤 쉬게 해줬던 이야기
다음날 공주는 침대가 매트리스에 밑에 무엇인가가 있어 불편해서 잠을 못 이루었다며 불평을 했고, 사람들은 그 정도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는 공주가 틀림없다며 진짜 공주로 인정을 해주는 이야기.
글쎄, 이불이랑 매트리스를 그렇게 깔았으면 사실 완두콩이 있어서 불편했다기보다 쌓다가 어그러진 부분이 몸에 배겨서 그랬을 거 같단 생각이 먼저 들긴 한다. 하지만 다른 공주들은 편하게 잤는데 혼자 불편했다고 하니 진짜 공주만이 느끼는 차이가 있었던 건 맞는 것도 같다.
노동조합을 시작하면서 가장 달라진 점은 나도 모르게 차이와 차별이 보인다는 것. 차이는 문제가 사실 되지 않지만 그게 차별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 눈이 뜨이면 세상 모든 것이 불편해진다. 글을 읽어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도 쉬 넘어가기 힘들다. 저 단어는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내용인 게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생각도 아직 혐오와 편견에 차 있는 걸 느낄 수밖에 없어진다.
얼마 전 연수에서 본인이 직장생활 중 일터에서 노동환경에 대한 평가를 한 적이 있다. 0에서 시작해 노동환경이 좋으면 +1로 아닐 경우 -1로 평가를 하는데, 총 18개 문항을 끝내고 강사님이 최저점인 사람을 찾아서 커피 기프티콘을 주신다고 했다. 강의내용의 기준이 모든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질문이라 공무원의 경우 7점이 보통 최하점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3점이 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동기가 ' 왜 이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아. 좀 긍정적으로 봐. ' 라고 했다.
내가 특별히 차이나는 환경에서 근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보일 뿐이다. 한번 보이기 시작하면 안 보려고 애써 무시해도 보이는 게 차별이다. 그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중학교 때였던 거 같기도 하고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음악 선생님이 비발디의 사계 중 하나를 틀어주셨고 우리에게 이 음악이 그 중 어느 계절인지 한번 맞춰 보라고 하셨다. 느껴보라고 잘 들어보면 그 계절 느낌이 있다고, 우리는 내키는 데로 찍어서 대답했던 것 같다. 확률은 4분의 1이니까.
"겨울!", "봄!","여름!","가을!"
막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아니 얘들아? 이게 안 느껴져? 폭풍 같은 바람 느낌. 여름이잖아!"
솔직히 모르겠더라.
음악 선생님은 선명하게 차이를 느끼셨지만 글쎄 모르겠다가 우리 심정이었다. 음악선생님께는 선명하게 들리는 차이가 우리에게는 그저 클래식 음악일 뿐.
노동인권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안 보인다.
그러다가 내 처지가 보이고
그러면서 맘에 분노가 차고
나보다 처우가 나은 다른 노동자에게 오히려 화가 난다.
그러다 다른 노동자가 보이고
결국은 노동자들끼리 싸우고 있는 현실이 보인다.
그게 보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차라리 안 보였으면 좋았겠다 싶을 때도 있다.
담장에 사다리를 올려놓았더니 세상의 추악함이 더 잘 보여서 차라리 사다리를 안타고 올라간 게 나았다고 말하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담장 너머 세상이 안 보였으면 편히 살았을 텐데 하는 내용.
우리는 모두에게 사다리를 건네주면서 이 사다리를 타고 위로 같이 올라가자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이 사다리 타고 올라가니까 저런 세상이 보여 우리 함께 고민하자"라고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사다리에 올리는 것이 아니다.
이 울타리 군데군데 부셔서 어디서나 안이 보이도록 구멍을 내는 일이다.
구멍이 커지고 울타리가 의미가 없게 하는 일.
굳이 안 보려고 해도 보이게 만드는 것.
나 역시 아직 모르고 안 보이는 것 천지다.
내 삶 역시 녹록지 않아서 그냥 모든 신경을 끄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어주는 분들 여러분들이라면 조금 나와 비슷한 맘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
그 기대로 글을 써본다.
우리 모두의 환경이, 삶이 조금 나아지기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