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 옆방에 시엄마가 살고 있어
06_시어머니가 욕을 하는 까닭은
좋지 않은 일은 떼로 온다.
시어머니한테 대차게 욕을 얻어먹은 후, 그녀와 또 부딪히면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나는, 코스트 코Costco에나 다녀오자며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이런저런 것들을 산 후 계산을 위해 줄을 섰다. 주말이라 코스트코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남편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남편의 사진이 박힌 코스트코 멤버십 카드와 시어머니의 이름이 적힌 체크카드를 들고 아주 천천히 줄어드는 계산 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영어로 된 말소리는 내 귀를 왕왕 울려댔고, 오전에 시어머니로부터 들은 욕설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다음의 말들을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지-랄-염-병-육-갑-들-떨-고-있-네-지-랄-염-병-육-갑-들-떨---
세상에서 제일 쉬운 영어는 '돈 쓰는 영어'란다. 원하는 걸 사고 카드만 내밀면 되니까. 내 코 앞에서 뭐라 뭐라 어려운 영어로 쏼라쏼라 해도 상관없다. 돈 가진 자가 '왕'이다. 왕은 신하의 말 따윈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
드디어 계산대에 내 차례가 왔다. 화장실에 간 남편은 배탈이 단단히 난 건 지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만, 상관없다. 난 '왕'이니까.
물건들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전광판에 금액이 찍히고, 블라블라 토털 얼마라고 캐셔가 말한다. 난 늘 하듯 기계적으로 멤버십 카드와 체크카드를 건넸다.
담당 캐셔는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는 덩치가 무지하게 큰 흑인 남자. 길에서 보면 피하고 싶은 외모다. 계산하는 내내 옆 라인 캐셔와 뭐라 뭐라 웃고 떠드느라 앞에 서 있는 손님(바로 '나')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멤버십 카드에 있는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It's not you, right?(이거 너 아니지?)" 그런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It's my husband. (남편이야.)"
캐셔가 말했다. "What?(뭐라고?)"
내가 다시 대답했다. "My husband. He'll come soon.(남편이라고. 곧 올 거야.)"
그가 다시 물었다. "What?(뭐라고?)"
나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는 갑자기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내가 건넨 체크카드를 또 유심히 보았다. 그러더니 "Is this debit card yours?(이 체크카드 니 거야?)"라고 묻는다.
나는 대답했다. "It's my mother-in-law's. She's old and sick, so I bought these things instead of her.(시어머니 거야. 그녀는 나이가 많고 아파서 내가 대신 장을 보는 거야.)"
그는 "What?(뭐라고?)"이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매니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이 새빨게 졌다. 나를 카드 도둑으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구나!
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찰나에 남편이 계산대에 도착했다.
남편은 캐셔와 그의 부름을 받고 도착한 매니저에게, 멤버십 카드는 본인 것이고 체크카드는 그의 어머니 거라고 설명했다. 전화를 걸어 확인해도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매니저는 남편의 성과 시어머니의 성이 같은 걸 확인한 후 의심의 눈초리는 풀었다.
미국에선 결혼과 동시에 아내의 성이 남편의 성으로 바뀌므로 자녀와 엄마의 성이 같다. 성이 같으면 가족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결혼을 해도 아내의 성이 바뀌지 않으니 자녀와 엄마의 성이 같을 수 없지만, 다행히 남편과 시어머니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씨인 '김 Kim'였다.
한국 문화를 모르는 코스트코 매니저 덕택(?)에 공개망신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는 이 체크카드로 계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 때문에 지연된 계산 줄에 서 있는 사람들 얼굴엔 짜증이 늘어갔다. 캐셔는 도둑을 잡은 영웅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했다. 매니저는 그 자리에 걸맞은 최소한의 예절로만 우릴 응대했다.
우린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나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서둘러 결제를 마치고 아주-아주 씁쓸한 기분이 되어 매장을 바삐 떠났다.
주차장으로 나와 차에 올라타고 남편과 단둘의 공간에 있게 되자, 내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지랄 염병, 육갑들 떨고 있네."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휴우... 화가 너무 나서 입이 자동으로 움직였나 봐.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거든. 욕 하니까 속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네."
시어머니의 체크카드를 쓴 우리 잘못은 인정한다. 하지만 여태까지 수십 번 이 카드로 장을 본 내내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겪으니, 나는 몹시 억울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도둑놈 취급한 무례한 캐셔, 그에게 따끔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게 속이 상했다.
한국에서라면 아무 일도 아닐 일들이 서툰 영어로 말을 하다 보니 매번 너무나 힘들고 고단했다.
새벽 2시까지 나는 잠들지 못하고 멀뚱멀뚱 천정만 쳐다보고 누워있었다.
시어머니에게 욕을 얻어먹은 일과 코스트코에서 도둑놈 취급당한 일들이 엉켜서 머릿속에서 무한루프를 돌았다.
감-히-나-를-도-둑-놈-취-급-을-지-랄-염-병-is-this-debit-card-yours?-우-라-질-놈-들-you-can't-pay-with-this-card-영-어-싫-어-미-국-싫-어-
나는 잠자기는 글렀다 싶어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새벽 3시가 다 된 시간인데, 시어머니가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에 앉아 계셨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냥 지나치려다가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안 주무시고 뭐하세요?" 물으며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시커먼 캘리포니아 하늘을 보며 아주 달고 맛있게 담배 연기를 뿜다가 내 인기척에 깜짝 놀라며 돌아봤다.
그녀도 아직 나를 어떻게 대할지 정하지 못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담배연기 때문에 좀 떨어져 선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시커먼 하늘 끝에 걸려있는 어슴푸레한 구름 자락을 쳐다보았다.
"넌 안 자고 왜 나왔니?"
"그냥 깼어요."
그녀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내게 욕을 해서 그녀의 마음도 싱숭생숭한 걸까? 이 새벽에 혼자 앉아 줄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아까 저한테 욕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이 집에서 몇 개월은 더 살아야 하는데 이런 껄끄러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단도직입적으로 맞닥뜨리기로 했다.
"욕?"
그녀의 표정으로 봐서 시치미를 떼는 건 아닌 것 같고,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아까요. 지랄 염병 어쩌고 하셨어요. 저한테."
"지랄 염병? 그게 욕이냐?" 시어머니가 말했다.
"버릇이 돼서. 내가 그 정도 욕도 안 하고 여기 미국서 혼자 어떻게 견뎠겠니?"
그녀는 다시 시커먼 허공으로 고개를 돌리고 허연 연기를 길게 뽑아냈다.
나는 속에 담았던 말을 꺼내놓자 마음이 한결 느슨해졌다.
담배연기가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벤치 한쪽 끝에 앉았다.
"미국 인종들 정말 별별 놈들이 다 있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시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 사람이 다 똑같지, 미국 사람이라고 뭐 얼마나 다를라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뾰르뚱하게 토를 달았다.
그녀는 내 말투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다르더라. 처음 네일숍 열었을 때 말이다. 오빠들한테 빌린 돈 갚아야지, 렌트비도 내야지, 자동차 할부금도 내야지, 정말 빠듯하게 살았다. 정말 그땐 1달러가 아쉬웠지. 근데 이상하게 은행에서 신용카드 대금과 체크를 현금으로 바꾸면 항상 내가 생각한 것보다 돈을 적게 주는 거야.
영어가 달리니까 처음 몇 번은 그냥 지나갔는데, 자꾸 똑같은 일이 생기니까 이상하다 싶어서 큰 오빠한테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게 말이다. 미국 놈들은 체크를 많이 쓰잖니. 체크엔 금액을 숫자로 쓰는 칸 하고 글자로 쓰는 칸이 있는데, 은행에선 글자로 쓴 금액을 기준으로 돈을 준다는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숫자만 봤지 뭐냐."
"어머, 그럼 숫자랑 글자를 다르게 쓰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정말 나쁘네."
적군이 등장하자 나는 금세 그녀와 한편이 되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나는 네일 하랴 돈 받으랴 바쁘니까 체크를 받으면 숫자만 봤지. 글자 볼 시간이 어딨간? 오빠 말 듣고 나서 체크에 쓴 글자를 자세히 보기 시작했지.
그랬더니 말이다. 어떤 년이 비싼 네일 하고 나서 75달러라고 숫자로 쓴 밑에 Seventeen five라고 쓰는 거야. 요년이구나 싶었지.
그래서 "Excuse me. Write Seventy here, not seventeen.(여봐요, 70이라고 써야지, 17이라고 쓰지 말고.)" 그러고는 "쌍년아, 니년이었구나." 해줬지. 미국 놈들은 한국말 못 알아들으니까. 나도 스트레스 풀자 하고 해 봤는데, 의외로 시원하더라.
네일숍 하다 보면 손님뿐만 아니라 일하는 스페니쉬들도 온통 말썽이라서 그럴 때마다 "지랄 염병들 하네." 이런 말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야 나도 숨통이 좀 튀지 않겠니."
하늘 저쪽 끝에서 푸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답하며 나는, 오후에 코스트코 주차장에서 내가 했던 욕을 떠올렸다.
"그래... 이젠 고쳐야지. 이젠 그런 사람들 상대할 일도 없고. 들어가자."
시어머니는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예상치 않게 화해 비슷한 걸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당장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이렇게 정리되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