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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Aug 04. 2020

조심해! 옆방에 시엄마가 살고 있어

07_침묵의 늪에 빠져버렸다.

미국 살이 두 달째. 급히 처리할 일도 바삐 해결해야 할 문제도 이젠 없었다.

포니아의 넓고 맑은 하늘은 올려다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나는 수시로 정원 바닥에 앉아 옆 집에 핀 이름 모를 꽃나무에 사는 작고 예쁜 벌새 구경에 빠져 있었다. 엄지 손가락만한 벌새가 웅웅대며 공중에 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가 어딘지 잊을 수 있었다.

이제 정말 여행을 떠나볼까. 더 나은 코스를 계획하느라 하루하루 출발을 미루다가  여행 따윈 가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 매일이 토요일 오전 같은 날들이었다.


내 손으로 정리한 집안 구석구석 보며 지내다 보니 이곳이 시어머니의 집이라는 걸 자주 잊었다. 내 방식대로 더 많은 것들을 바꾸고 싶어진 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찾아 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수납장을 열어젖히고 내가 정한 질서대로 정돈했다. 식재료들은 농수산물 종류별로 칸칸이 따로 수납했다. 식기는 자주 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해서 꺼내 쓰기 편하게 했고, 입구가 바닥에 닿게 거꾸로 세워져 있는 머그컵들은 입구가 위로 가도록 바로 세웠다. 지저분하게 흩어있던 조미료들을 한데 모은 후 종류별로 정리했고, 꽉 잠겨있지 않아 번번이 내용물을 흘려대던 조미료통의 뚜껑을 힘주어 닫았다.


한결 깔끔해진 주방을 보며 기분이 한껏 업된 나는 방에서 쉬고 있는 시어머니를 불러내 수납의 기준을 말하고 변경된 위치와 순서를 알기 쉽게 두 번씩 설명했다.

"어머니, 아셨죠?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설탕은 유리병에 담아서 이 앞에 놓았어요. 똑같은 참기름을 3병이나 사셨어, 왜요? 아직 뜯지 않은 새 조미료들은 모두 이쪽 아랫칸에 모아 놓았어요. 보이시죠? 참 그리고 병뚜껑. 뚜껑을 잘 잠그지 않으셔서 정리하다가 여러 번 쏟을 뻔했어요. 앞으론 꼭 잠그세요. 꽉이요. 아셨죠?"

내 설명을 말없이 듣던 그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그래, 알았다" 말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수고했다" 정도의 칭찬쯤을 기대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말끔해진 수납장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어머니와 앞으로 살아갈 이 걱정인 나는 '돈'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달랐다. "앞으로 얼마나 산다고 그깟 돈푼을 아끼냐. 그냥 무조건 비싼 거 사면 잘 사는 거야."라고 말하는 시어머니는 내가 가성비를 따져가며 사 온 것들을 마뜩지 않아했다. 식사 후 남은 음식들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가 끝까지 먹어 없애는 나를 못 마땅해했다. 하지만 난 상관없었다. 내 방식이 옳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


절약과 저축을 미덕으로만 알고 살아온 나였다. 뭐든 첫눈에 든 물건을 사고 쓸모 없다 생각되면 그 즉시 버려버리는 시어머니가 내 보기엔 크게 잘못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일흔이 넘도록 살았어도 서툴기만 한 그녀의 일상에 참견하고 싶어졌다. 내가 아는 올바른 방법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렇게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해야 할 아름다운 거리는 사라져 갔다.


시어머니는 점심식사 때 먹다 남은 오이무침을 버리려는 참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아까운 걸 왜 버리냐며 그녀의 손에 든 반찬통을 낚아채려 했다.

"얘, 넌 정말... 다른 멀쩡한 먹으면 되잖니. 이거 이제 맛 없어져서 버리려는 거야."

난데없는 그녀의 짜증에 의아했지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었다.

"누가 어머니 보고 드시래요. 제가 먹는다니까요." 반감을 담은 내 대답이다.

"얘, 넌 정말 왜 그러니. 뭐든 니 멋대로 하면 다야? 이건 버릴 거야. 버릴 거라니까." 그녀는 소리를 빽 지르며 반찬 그릇을 싱크대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점심때까지 멀쩡했던 오이무침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맛이 갔을 리 없지 않나. 열두 번 뒤집어 생각해도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이번에도 내가 맞고 그녀가 틀렸다.

지난밤에 먹다 남은 수육을 내가 분명히 냉장고에 넣었는데 없어진 걸 보니 그녀가 버린 게 틀림없다. 지구 어디선가엔 아직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뭐든 쉽게 버리는 그녀가 미워졌다.


시어머니는 물건을 샀다가 반품하러 다니는 나를 한심스러운 듯 보았다. 고작 10 여불 받자고 빈병과 캔, 페트병들을 한가득 모아 재활용센터에 갖다 주는 나를 구차하게 여겼다.

내가 코스트코에서 사 오는 식료품들을 보며 그녀는 경멸을 담은 말을 자주 했다.

"얘, 그런 거 먹지 말고, 홀푸드365에 가서 유기농 사다 먹어. 넌 자꾸 그런 싸구려를 사 오니."

그녀의 말은 내 자존심을 긁었지만 어느덧 이 집에서 나의 입지는 그녀만큼 강해져 있었다. 나는 깊숙한 수납장 하나를 비워 내 전용 식료품 창고로 만들어 그녀의 것들과 분리했다.


닥에 패대기 쳐진 오이무침과 깨진 그릇 조각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옳고 그녀가 틀렸다는 믿음이 강해질수록 나는 더 억울했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시어머니에게 아침인사를 건넸지만 무시당했다. 그다음 날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내 아침인사가 무시당하자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건넬 필요를 느끼지 않았.


남편이 말했던 '아름다운 거리'는 어쩌면 '이역만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갈 날은 아직 까마득했다.


식사를 준비하고 먹는 시간 외에는 되도록이면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득이 방 밖으로 나가야 할 때엔 시어머니의 위치를 파악해서 그녀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도나 세탁실 같은 데서 우연히 맞닥뜨리면 유령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2주쯤 지나자 우연히 한 공간에 있게 되어도 전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진 않았다.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서로의 존재를 개의치 않고 애초에 하려 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멀쩡히 보이는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게 맘 편할 리 없었다. 가슴은 늘 답답하고 조마조마했다.


지옥에서도 살아진다 했던가. 달을 넘기니 갑갑하고 불편한 마음살이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시어머니가 병원에 가느라 외출한 날, 나는 오랜만에 맘 편히 집안 곳곳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시어머니와의 냉전이 시작된 후 집안일에서 손을 놓았더니 수납장 속은 예전의 무질서 상태로 돌아가 있었고 냉장고 속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김치 국물만이라도 닦아내자며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는 어느새 냉장고 속 음식들을 모두 꺼내 정리하고 있었다. 냉장고 맨 아랫칸 구석박이에 뒤집어져있는 플라스틱 통을 꺼내다가 나는 온몸이 굳어 버렸다. 시어머니가 몰래 버렸다고 확신했던 바로 그 수육이었다. 다른 반찬을 넣으면서 구석으로 구석으로  밀려났던가 보다. 그래서 넣은 자리만 확인했던 내 눈엔  띄지 않았나 보다.

이제 먹을 수 없게 된 '수육'은 시어머니의 결백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함께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침묵의 늪'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오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연했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미국까지 와서 하지 않아도 될 고단한 일을 찾아 하는 모습을 안쓰러워했던 건 아닐까. 풍요로운 미국에 왔으니 값이 좀 비싸도 좋은 것들을 먹었으면 했던 건 아닐까.

짧은 영어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소통만 하며 아주 오랫동안 홀로 살아온 그녀는 타인과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데 서툴렀을 뿐인 건 아닐까.


'한마디 말'이면 가슴 답답한 '침묵의 늪'에서 당장 빠져나올 수 있지만, 나의 입은 쉬이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엔 '나무관세음보살' 주문도 공자님의 '바다 둥둥' 솔루션도 통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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