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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Aug 11. 2020

조심해! 옆방에 시엄마가 살고 있어

08_컵을 뒤집어 다시 원래대로

살다 보면 머리를 싸매고 아무리 고민해도 풀 수 없던 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스르륵 풀려버리는 때가 있다. 이런 걸 두고 하늘의 뜻이라고 하나 보다.


이번엔 절대로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무 아비타불 관세음보살을 노상 읊고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딱딱한 게 씹혀서 얼른 뱉어 보니, 10년쯤 전에 어금니에 해 넣었던 금니(전문용어로는 골드 인레이라고 한단다.)였다. 금니가 빠진 자리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당황해서 어쩌지 못하는 내게 남편은 원래 있던 자리로 금니를 다시 넣으라고 했다. 해외출장이 잦았던 남편은 이런 경우를 종종 봤는데, 임시방편으로 이렇게 하면 출장 일정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금니를 제자리에 넣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나 임시방편은 임시일 뿐. 다음날 아침식사 후 나는 다시 어금니에 커다란 구멍을 느꼈고 금니는 어디론가- 아마도 내 뱃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미국에서 의료보험 없이 병원에 가는 건 탈탈 털리러 가는 거라고 했다. 그중 단연 으뜸이 치과라고. 미국 의료보험이 없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 집에 가자!


귀국 일자는 3일 후로 잡혔다.


탁실에 갔다가 우연히 시어머니를 만났다. 서로 무시하며 산 시간의 관성 탓에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칫했지만, 나는 숨을 고르고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한 달 만이었다.

“어제 금니가 갑자기 빠졌는데, 여기선 치료를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갑자기 돌아가게 됐어요."

두서없이 꺼낸 말은 변명이 되어버렸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 안 그래도 너희가 곧 떠날 것 같았어. 이 나이가 되니까 감이 좋아지더라."

평소같지 않게 그녀는 담담했다.

휴우 다행이다. 침묵의 늪은 걱정했던 것만큼 깊지 않았나 보다.


캐리어를 꺼내 짐을 꾸렸다. 반 이상은 비어갈 것 같았는데, 시어머니에겐 쓸모없을 물건들을 넣다 보니 되려 올 때보다 짐이 많아졌다. 가방에 든 짐을 뒤적이며 뭘 빼야 하나 고민하는데 시어머니가 문가에 서서 물었다.

“집에 가니 좋으냐?”

“금니만 안 빠졌으면 이렇게 빨리 안 가도 되는데, 죄송해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 너 맘고생 많았지? 근데, 나도 많이 힘들었다. 너 울고 그러고 나서 몇 번인가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 그랬다.”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가방 속만 계속 뒤적거렸다.

“뭘 그렇게 뒤적거리냐. 가방 부족하면 얼른 코스트코 가서 하나 사 와.”

침대가에 앉으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에요. 무게 제한이 있어서 많이도 못 가져가요. 뭘 빼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그럼 니 가방 나 주라. 거기 그거.”

시어머니는 내가 한국에서 2만 원 주고 산 낡은 크로스백을 가리켰다.

“이거 싸구려예요.”

“그래, 그거 고 병원 다니면 편켔다. 한번 매보자

백을 시어머니 어깨에 둘러매 주는데, 남편이 어디서 났는지 두 손 가득 오디오용 전선을 들고 들어왔다.

가방 꽉 찼어. 그거 넣을 데 없는데, 어쩌지?

나는 남편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저거도 나 주고 가라.”

시어머니는 남편의 반팔 패딩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국에 온 첫날, 시어머니가 맘에 들어하길래 남편이 그녀에게 주었던 패딩이다. 그녀는 나와 냉전이 시작된 후 갑자기 싫어졌다며 남편에게 되돌려 줬다.

“싫어. 오마이가 싫다며. 이거 내 거야. 내가 얼마 만에 산 옷인데.”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줘. 나 기념으로 아들 옷 갖고 있을래.”

시어머니는 어리광 섞인 말투로  말하며 이별의 서운함을 지우려했지만 나는 마음 한 쪽이 아려왔다.

나는 남편의 옷을 잘 접어 시어머니 곁에 놓았다.

우리는 침묵의 늪에서 보낸 시간을 잊고 다시 사이좋은 가족이 되었다.


출국 전날 밤, 나는 미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한꺼번에 머릿 속을 어지럽혀 잠들 수 없었다. 우유나 한잔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해보자며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컵을 꺼내려고 수납장을 여니 컵들 중 반은 거꾸로 서있고, 나머지 반은 똑바로 서있었다. 입구를 위로 향하고 똑바로 서 있는 컵 중 하나를 꺼내 우유를 부어 마시다가 나는 다시 수납장을 열고 똑바로 서 있는 컵들을 모두 뒤집었다.

지저분한 수납장 바닥에 컵의 입구가 닿는 게 위생상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는 수납장 속 컵들을 입구가 위로 가도록 똑바로 세웠었다. 그 후 한동안 수납장 속에선 컵을 뒤집어놓는 시어머니와  똑바로 놓는 나 사이에 기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시어머니가 쓰는 컵은 그녀의 방식으로, 내가 쓰는 컵은 내 방식으로 놓는 걸로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우유를 홀짝이며 주방을 둘러보았다. 조미료통들은 어느새  다시 뚜껑을 설렁설렁 덮고만 있고, 그릇과 접시들은 내가 미국에 도착한 날과 똑같은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조미료통 뚜껑을 닫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어머니였다.

“미미 년(강아지)이 자꾸 낑낑대서 나와봤다. 잠 안 자고 뭐하냐.”

“아, 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그거, 그냥 두거라.”

시어머니는 내 손에 들린 조미료통을 보며 말했다.

“아, 이거요. 뚜껑만 닫아놓으려고요. 위치는 그대로 둘게요. 어머니 놓으시는 방식대로요.”

“그 뚜껑 닫지 말라고. 너무 꽉 닫아 놓으면 내가 열지를 못해. 이젠 열어달라고 할 사람도 없잖니.”

조미료통 뚜껑을 열지 못한다고? 왜?

새로 산 양념병 뚜껑을 열지 못하는 시어머니가 내게 열어달라고 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건 쓰던 병의 뚜껑이 아닌가.

“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관절염 때문에 뚜껑 여는 것 힘이 들어.”

시어머니는 마트에 가면 늘 사는 물품들만 얼른 집어서 집에 돌아온다고 했다. 관절염 때문에 오래 걷는 게 힘에 부친다고. 우리가 미국에 와서 제일 좋았 건 그녀가 더이상 마트에 가지 않아도 돼서 라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도 했다.

관절염은 무릎이나 어깨, 이런 곳에만 생기는 줄 알았다. 손가락에 관절염이라니. 나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조였던 뚜껑들을 모두 열어 슬쩍 덮어놓 다른 수납장도 모두 열어 시어머니의 방식대로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이제,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돌아올 거고, 시어머니와 또 투닥거릴 거고, 또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족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어머님, 안녕히 계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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