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소설
복권에 당첨됐다는 전화를 받고도 나는 기쁘지 않았다. 그날 그 상자를 보지 않았다면 “축하드려요. 한 턱 쏘세요.”하며 호들갑을 떨었을지 모를 일이다.
“점심 사줄 테니, 요 앞 밴댕이 횟집으로 나오너라.”
전화를 끊으며 시아버지가 말했다.
며칠 전 시아버지의 이사를 돕기 위해 새집에 먼저 와있던 나는 이삿짐들 속에서 이상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낡은 상자였는데, 얼마나 자주 묶었다 풀었다 했는지 노끈이 너덜너덜했다. 홀로 사는 시아버지의 살림과 내 살림 간엔 경계가 없어진 지 오래였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아주 오래된 주택복권부터 최근 날짜가 찍힌 로또까지, 수백만 장은 될 것 같은 복권들로 가득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신호를 보내듯 내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먼지 앉은 바닥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데 시아버지가 도착하셨다. 나는 상자를 가리키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아버님은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고 상자를 급히 덮으며 내게 고함쳤다.
“내 짐은 내가 정리할 테니, 넌 네 집에나 가거라.”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에 검색하니 사과박스를 1만원권으로 가득 채우면 2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그럼 상자 속 복권은 어림잡아도 1억원은 되지 않을까! 속에서 열불이 났다.
추위를 많이 타는 시아버지가 낡은 집에서 사는 게 안쓰러웠던 남편과 나는 ‘신축원룸분양’ 현수막을 보자마자 적금을 깼다. 시아버지가 살 집을 계약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동안, 시아버지는 복권 따위를 사는데 돈을 낭비하고 있었다니….
시아버지는 어쩌면 복권 중독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고, 이런 일로 외국에 있는 남편에게 고민거리를 더해주긴 싫었다. 술, 담배를 끊듯 복권도 끊을 수 있다고 믿으며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복권 당첨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인터넷을 뒤지며 복권중독치료법에 골몰하는 중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나는 외출 준비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야채를 체 썰고 다지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올 뿐 식당 안은 파리가 왱~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손님은 시아버지와 나, 둘뿐인데, 주문한 지 한참 된 음식은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입을 꾹 다문 채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복권은 언제부터 사신 거예요?”
적막을 깨고 내가 말했다. 시아버지는 그제야 시선을 내게로 옮기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복권뿐이었다.”
사업이 부도난 후 재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시아버지는 단칸월세방으로 쫓겨가던 날, 우연히 복권을 샀는데 그게 꽤 큰 금액에 당첨되었다고 하셨다. 혼자 힘으로 벌어본 가장 큰돈이었단다. 당첨금 덕택에 방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고 가족들에게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고도 했다.
자상하진 않지만 깔끔하고 조용한 분이었다. 그가 뭔가에 중독되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엔 ‘치료의 시작은 중독의 인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단 인정하면 치료는 식은 죽 먹기라고도 했다.
“그 돈을 모았으면 집도 살 수 있었을 거에요. 아버님은 복권에 중독된 거예요.”
시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밴댕이 회무침이 나왔다. 강화도가 고향이라는 식당 주인은 밴댕이 젓갈로 담갔다며 순무김치를 함께 내왔다. 시아버지는 “내 고향은 교동도요.”하며 고향동무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음식 준비에 오래 걸린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회무침은 접시의 가장자리까지 꼭꼭 눌러 수북이 담겨 있었다. 제철인 밴댕이회를 얇게 저미고 오이, 당근, 양배추에 갖은양념을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쳐냈다며 주인은 맛에 자신만만했다.
순무김치에게 “오래간만이다.” 인사하며 시아버지는 순무김치를 밥 위에 얹어 드셨다. 나는 젓가락으로 회무침을 집었지만, 도무지 식욕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 사업은 어머니 거였지. 난 망해 먹은 무능한 아들이고.”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갑자기 고백 톤으로 바뀌었다.
“복권은 말이다…. 내게 이 밴댕이 회무침 같은 거다. 평소엔 잘 먹지 못하는 이런 특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니? 월요일에 복권을 사면 일주일 내내 설레고 행복하다. 당첨되면 뭘 할까? 옛집을 되사면 어떨까? 니들한테 아파트 한 채는 사줘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 하루가 덜 지루하고…. 복권은 내가 먹고 싶은 걸 줄여서 사니까, 너무 염려는 말아라.”
‘복권이 특식’이라는 말을 듣는데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물론, 시아버지는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난 그저 복권 살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복권은 시아버지에겐 마음의 양식이었던가 보다. 순간 나는 중독치료고 뭐고 다 시큰둥해졌다. 젓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밴댕이를 보고 있자니, 내 심보가 꼭 밴댕이 소갈딱지 같아 부끄러웠다.
“1등 복권에 당첨되면 뭐 하고 싶으세요?”
내 질문에 시아버지는 오랫동안 준비한 듯한 답을 했다.
“1등에 당첨되면 다 너한테 맡길 거다. 반은 네가 갖고, 반은 매월 조금씩 나한테 보내주라. 그리고….”
이미 1등 당첨자라도 된 듯 아버님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1등 당첨금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은행에 가서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상속세니 증여세니 하는 무서운 세금을 피할 수 있단다. 요즘 유행하는 꼬마빌딩을 사는 건 좋지만, 사업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따박따박 월급 받아 사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그는 생기지도 않은 일들을 고민하며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보낸 게 틀림없었다.
남은 밴댕이 회무침을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눈치 빠른 주인은 시아버지가 아주 잘 드신다며 순무김치도 함께 포장해 주었다. 식당을 나서며 포장봉투를 시아버지에게 내밀었다. 봉투를 받으며 시아버지가 말했다.
“저녁 반찬 걱정은 없겠구나. 고맙다. 그리고… 복권 사는 돈, 반으로 줄였다. 그날 고함쳐서 미안하다.”
시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걷다 보니, 당첨 축하인사도 드리지 않고 점심을 얻어먹은 게 퍼뜩 떠올랐다.
“아버님, 복권 당첨 축하드려요! 그런데 얼마짜리에 당첨되신 거에요?”
뒤돌아보는 시아버지는 활짝 웃으시며 열손가락을 쫙 피셨다. 나는 그게 10만원인지, 100만원인지, 그것도 아니면 혹시 1억? 혼자서 금액을 상상하며 즐겁게 걸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