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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Aug 23. 2022

엄마의 냉장고

아주 짧은 소설

냉장고에서 꺼낸 대파는 무르고 시든 부분을 잘라내니 반밖에 남지 않았다. 얄풋 썰어 프라이팬에 담고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두르고 볶자 향긋한 파향이 벌써부터 식욕을 자극했다. 다진 마늘을 한 큰술 넣었더니, 와우! 스파게티 면을 비벼 먹으면 딱이겠네, 싶었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바로 묵은지. 물에 푹 담갔던 묵은지를 꺼내 물기를 꼭 짠 후 총총 썰어 파기름이 자글한 프라이팬에 넣고 다시 한번 달달 볶았다. 시큼한 묵은지의 향기가 다시 한번 코끝을 자극했다. 이거 하나면 밥 한 공기는 뚝딱이겠군. 이제 그릇에 예쁘게 담고 깨소금을 소로록 뿌리면, 짜잔~ 완성!


전기밥솥이 밥이 다 됐으니 저으라는 말을 하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다신 그 할망구랑 고스톱을 치나 보자.”

엄마는 뿔이 잔뜩 나서 집안에 들어섰다.

엄마는 요즘 경노당에서 매일 고스톱을 치는데, 셈이 빠른 엄마는 매일 10원 짜리를 한 움큼씩 따고선 신나 했다.

"순이 할머니가 또 막판에 엎었구나.”

옆 동에 사는 순이 할머니는 평소엔 엄마와 죽이 잘 맞아 시장 갈 때도 산책 갈 때도 함께 했지만, 고스톱만 치면 티격태격했다. 매일 싸우고 매일 화해하니 걱정할 일은 전혀 아니다.


“엄마, 식사 하세요.”

나는 묵은지볶음에 방금 한 밥을 퍼서 상을 차렸다.

식탁에 앉으며 엄마는 “묵은지는 어디서 났어?” 하셨다.

“어, 이거, 우리 집에서 가져왔어” 하얀 거짓말을 하며 나는 슬며시 웃었다.

사실, 묵은지볶음은 엄마의 냉장고에서 백만년쯤 묵은 김치를 꺼내 만든 거였다.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엄마는 어렸지만 한국전쟁까지 겪으셨다. 궁핍한 시대를 겪어낸 분들이 그렇듯, 엄마는 물건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엄마의 집엔 오래되고 고장난 물건들, 낡아서 입을 수 없는 옷들로 넘쳐났지만 엄마는 절대 버리지 못했다. 정신분석학 용어론 ‘저장강박증’이라는데, 나중에 혹시 필요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원인이라고 한다.

엄마의 강박은 냉장고 속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먹다 남은 음식들은 모두 냉장고로 들어갔다가 영영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고, 새로 산 야채와 과일도 먹지 않은 채로 시들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냉장고 정리를 해주겠다고 내가 여러 번 나섰지만 엄마는 요즘 것들은 너무 잘 버린다며 극구 반대했다. 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섰기라도 하면 냉장고 문 빨리 안 닫고 뭐하냐 호통치기 일쑤였다. 엄마의 낡은 물건들을 몰래 버리다가 수 차례 들킨 나로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TV프로그램을 보는데 나는 이거다 싶었다. 엄마 모르게 냉장고를 털어 반찬을 만들기로 결심한 지 벌써 한 달. 엄마는 아무 눈치도 못 채고 내가 만든 반찬을 맛있게 드셨다.


묵은지 볶음이 입에 맞았는지 평소 보다 많이 드신 엄마는 TV를 켜 놓은 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엄마가 잠든 틈에 나는 냉장고를 열고 다음엔 또 무슨 반찬을 만들까 고민했다. 장아찌들만 다 들어내도 냉장고를 좀 널찍하게 쓸 수 있을 텐데.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유리병에 담겨 있는 장아찌들은 냉장고를 반 이상 차지하고 있었다. 구석에 있는 마늘쫑 장아찌를 꺼내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우웩! 이걸 먹는다고? 싱크대에 소쿠리를 놓고 병째 들이부었다. 요상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엄마가 알면 큰일이다. 나는 부엌 창을 열어 환기를 하고 장아찌를 버린 소쿠리에 물을 틀어 초간장 국물을 얼른 씻어냈다. 엄마는 내가 버리는 걸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건 오해다. 특히 먹는 걸 버리면 천벌 받는다고 어렸을 적부터 배우고 자라지 않았나. 누구로부터? 바로 엄마로부터!


소쿠리에 담긴 마늘짱아찌는 방금 목욕을 마친 아가씨처럼 말끔했다. 버리기 전에 한 개를 집어 먹어 보았다. 뭐야? 이 맛난 걸 버리려 했다니, 진짜 천벌을 받을 뻔했군. 나는 아까와 똑같은 방법으로 파기름을 낸 후 마늘쫑을 볶기로 했다. 파기름의 향긋한 냄새에 선잠을 깬 엄마가 주방으로 오셨다.

“뭐하니? 마늘쫑은 또 어디서 났어?” 엄마가 물었다.

“아, 이거… 우, 우리 집에서 가져왔어.” 나는 또다시 하얀 거짓말을 하며 계면쩍게 웃었다.

내가 마늘쫑볶음을 밀폐용기에 담고 있는데, 엄마가 싱크대에 있는 병이 뭐냐고 물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장아찌병이었다. 나는 되도록 태연한 표정을 하고 답변을 생각하는데, 엄마가 병에 코를 대고 킁킁대며 말했다.

“장아찌 냄새가 나는데?”

나는 거짓말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거 엄마 장아찌야. 사실은 버리려다가, 물로 헹궜더니 괜찮더라고. 그래서 파기름에 볶았어. 엄마, 미안해.”

엄마를 위한 ‘하얀 거짓말’이었다 해도 거짓말은 거짓말이니까.

“묵은지 볶음도 내 김치로 만든 거지?” 엄마가 내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지난 번에 만든 만두는 내 깍두기로 만든 거였고?”

“엄마, 다 알고 있었어?”

“너, 거짓말 하면 얼굴 빨개져.”

“알면서, 왜 말 안 했어?”

“맛있어서. 내 김치 맛인지, 니 손맛인지는 모르겠다만.”

“나 하나도 안 버렸어. 정말이야.” 나는 가슴에 손을 대고 결백을 주장했다.

“알았어.” 엄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나 엄마 냉장고 정리해도 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알았다니까.”

“웬일이야? 왜 갑자기 해도 된대?” 순순히 그러라는 엄마가 수상쩍어 내가 물었다.

“오늘 경노당에서 또 한 명 갔어.” 엄마가 말했다.

“어딜 가?” 말하자마자 나는 아차 싶어 얼른 입을 닫았다.

엄마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나도 얼마 안 남았다. 할매들 모여 앉아 얘기하는데, 죽기 전에 자식들한테 줄 거 있으면 미리 주라고. 정리할 거 있으면 죽기 전에 정리해야지, 어영부영하다 그냥 가면 몽땅 쓰레기 신세 된다고. 나도 오늘부터 버리고 살 거야. 안 입는 옷도 다 버릴 거야.”

엄마가 내친 김에 옷 정리 하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의 오늘 결심이 며칠이나 갈 지 의문이지만, 나는 엄마의 결심을 응원하며 말했다.

“엄마, 화이팅! 참, 빨간 점퍼 버릴 거면 나 줘요. 등산 갈 때 내가 입을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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