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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Sep 20. 2022

시뮬라크르와 하이퍼 리얼리즘

#4



현실 속에 존재하는 '꿈과 환상의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현대 한국인들은 용인과 잠실에 있는 모 랜드와 모 월드를 떠올릴 것이다.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어른이들의 동심도 잃지 않게 만드는 곳. 유원지의 이미지란 그런 것이다. 아마존을 콘셉트로 만들어 밀림 속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기분을 만끽하게 하고, 사자와 호랑이 등 맹수들을 풀어놓은 동물원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존재하는 원본과 유원지가 복제해온 콘셉트는 결코 똑같지 않으며, 심지어 닮은 부분을 찾기 조차 어려운 경우도 많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강인 아마존을 용인 모 처에 똑같이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지에 잠식된 시대다. 세상은 수많은 이미지로 가득하고 그것이 사실인가 진실인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가정주부’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흔히 연상하는 앞치마를 메고 요리를 하는 중년의 여성을 떠올리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가정주부들이 얼마나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의 군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를 상기해보자. 여러 매체를 통해 구축된 이러한 ‘이미지’들은 마치 진리인양 보편성의 날개 아래 정의 내려져 있다. 가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판치는 세상. 이 세상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다.


 시뮬라크르를 ‘복제물의 복제’라는 의미로 처음 정의 내린 철학자는 플라톤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플라톤의 철학사상을 정리하면서 시뮬라크르 개념을 새로이 정립했는데, 그는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자답게 원본과 복제, 복제의 복제를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원본이 되거나 복사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모호한 개념을 좀 더 세부적으로 정리한 철학자가 장 보드리야르로 그는 시뮬라크르를 흉내 낼 대상이 없는 복제 즉 ‘원본 없는 복제’로 바라보았다. 그는 실재가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의 동사형)되어 시뮬라크르화 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원본이 되는 실재가 있고 이 실재에서 파생된 파생 실재나 복제 실재가 발생한다. 이 파생 실재와 실재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지거나 아예 사라지고, 오히려 파생 실재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 현상이 끝없이 순환된다. 이 파생 실재가 강화되면 초과 실재(하이퍼 리얼리티)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원본 없는 복제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지 않나 의아함이 들 법도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시뮬라크르 개념은 현대사회의 특징을 그 어떤 단어보다 잘 압축해 낸 단어로 평가받는다. 좀 더 가까운 예시로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광고들은 실재를 복제하여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특징을 설명하지만 그 이미지와 실재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중은 진실을 소비하지 않고 이미지와 기호를 소비한다. 복제된 허상으로 가득 찬 세상은 점점 더 공고해지고 복제의 복제가 더 강력한 실제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디즈니 랜드가 가상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 허상의 공간을 나와 보이는 세상도 사실은 허상으로 가득 찬 세계다. 온갖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이미지’는 허상일 수도 혹은 진실일 수도 있지만 이것을 매번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 랜드가 이 허상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현대사회에 만연한 시뮬라크르를 비판하며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CNN이 보도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여 이루어진 보도였으며 이것이 실제 일어난 전쟁의 모습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총과 미사일의 이미지는 있으나 이것에 맞거나 피해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보도되지 않는 등) 사람들은 보도 속 전쟁을 전쟁의 실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걸프전 보도를 현실 같은 허상일 뿐이라고 설명하며 무분별한 이미지를 아무런 경계 없이 믿는 마비된 사유에 일침을 가했다.


물론 보드리야르가 내 주변에 실재라고 확신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식의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조장하며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시뮬라크르 개념을 제시했을 리는 없다. 다만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진실이라고 믿는 정의나 이미지가 혹 허상이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에 숨겨진 함의일 것이다. 이러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철학을 기반으로 현대미술에서는 1960년대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향의 사조가 탄생하게 된다. 바로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의 등장이다.


극사실주의라고도 일컬어지는 하이퍼 리얼리즘은 사진이나 실물 이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방식을 취한다. 주로 인물이나 도시를 소재로 하며, 사진 같은 그림을 추구하는 ‘포토 리얼리즘’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여러 포토 리얼리즘 화가들과 하이퍼 리얼리즘 화가들이 사진을 찍은 뒤 이를 보고 화면을 구성해 그려나가는 방법으로 작업을 한다. 완성된 결과물만 보면 포토 리얼리즘 회화와 하이퍼 리얼리즘 회화를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실적인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중점으로 하는 포토 리얼리즘과는 달리 하이퍼 리얼리즘은 사진 프레임의 이미지를 넘어 극사실주의 이미지를 통해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하이퍼 리얼리즘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는 파생 실재 즉, 복제의 복제를 포착해 내는 일이다.


리처드 에스테스, <Time Square>, 2004


 하이퍼 리얼리즘의 대가로 손꼽히는 미국의 작가 ‘리처드 에스테스’의 작업들은 하이퍼 리얼리즘이 어떤 사조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미국의 일상적인 도시의 모습은 차갑고 건조하고 냉정해 보인다. 도시의 유리벽에 반사된 도시의 복합적인 풍경을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이고 인공적으로 모사해낸 화면은 현대사회의 공허와 정서적 마비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에스테스는 직접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골라 여러 시점의 사진을 촬영한 다음 그 사진을 조합하고 구성해 화면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따라서 마치 화면 앞 그 장소에 가서 서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도시의 풍경들은 엄밀히 말하면 실재를 재현한 그림이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자 조작된 풍경이다. 에스테스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보드리야르의 파생 실재 개념 그 자체를 보여준다.



또 다른 하이퍼 리얼리즘 거장인 ‘척 클로스’는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페이스 클로즈업된 인물화 작업을 한 경우다. 그가 ‘머리’라고 부르는 커다란 화면에 채워진 무표정한 얼굴들은 세밀하고 치밀한 묘사를 통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솜털과 땀구멍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표현은 오히려 실재와 모사된 그림 사이에 괴리감을 만들어낸다. 이후 그는 격자 안에 세포처럼 보이는 추상적인 망점을 그려 멀리서 보면 사실적으로 일렁이는 느낌의 초상화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극 사실주의 기법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제 현대미술에서 시뮬라크르와 하이퍼 리얼리즘은 기술 발전을 통해 2차원을 넘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라는 세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아직 실험적 단계 정도로 보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대표적 팝 아티스트인 '제프 쿤스'가 사진 공유 앱 스냅챗과 공동으로 증강 현실 제작한 ‘Balloon Dog(2017)’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몇 년 전 한창 유행했던 포켓몬 고의 게임 방식처럼 카메라 프레임 안에 실제 오브제가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한 미술작품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새로운 표현 방식과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실재보다 실재 같은 가짜들의 반란. 현대미술 속에서 하이퍼 리얼리즘의 여정이 어디까지 이어 질지 궁금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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