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의별 Sep 16. 2022

아우라

#3



 미술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려본 일이 있는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경험은 비교적 흔히 들어볼  있지만 미술작품을 보고 감정이 격화될 정도의 감흥을 겪었다는 이를 주변에서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미술작품을 보며 감정적으로 커다란 동요를 느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나오곤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 리더 RM 시카고 미술관에서 모네와 쇠라의 작품을 보고 본인만의 특별한 감정적 경험을  이후에 아트 콜렉터가 되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관람자를 눈물 흘리게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실신하게도 만드는 시각 예술에 대한 이 격렬한 감정적 동요는 일명 ‘스탕달 신드롬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대 미술 이전의 미술은 무엇보다도 예술가 스스로가 지닌 기술적 능력이 중요시되었으며 얼마나 아름답고 심미성 있게 만드느냐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었다.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피와 살을 깎아 있는 힘껏 실력을 발휘해 만든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마스터피스로 여겨지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이러한 미술 작품들은 관람객을 놀라게 하고, 때때로 숭고함과 경외감마저 일으킨다. 범인은 범접할 수 없는 예술가의 실력과 표현능력, 미적 상상력은 관람객의 오감을 일깨우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명작이라 부르는 작품들을 통해 받는 미적인 감동이 ‘스탕달 신드롬’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이상하게 느낄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는 기존의 전통적 미술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이 같은 가치들이 전체 세계를 구성하는 부분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감동을 일으키는 미술,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는 미술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인기를 끄는 미술의 흐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미술계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나 사물의 형태를 잘 재현해내는가, 혹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가의 문제는 (과거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뛰어난 기술적 역량으로 가졌던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는지 상기해본다면 더더욱) 현대에 와서는 다소 부질없는 문제가 되었다. 그 단적인 예로 2022년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전에서 AI가 그린 그림이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제이슨 앨런의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Theatre D'opera Spatial)’의 우승은 기술적으로 사람이 과학발전의 역량을 따라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진의 발명 이후부터 쏟아지는 각종 뉴미디어와 증강현실 등으로 대변되는 기술의 발전이 현대 미술작가들에게 기술력보다 기획력을 보다 더 요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우리는 미술에서 ‘얼마나 잘 그렸는가’를 찾지 않고 ‘얼마나 새롭고 특별한가’의 문제를 찾게 되었다.


이처럼 급변한 20세기 이후의 미술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설명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알레고리 장에서도 우리와 함께했던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다. 그의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인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미학 용어로써는 처음으로 ‘아우라’ 개념을 제시했다. 여기서 아우라는 우리가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아우라’가 맞다. 영화배우나 가수들에게 찬사를 보낼 때 ‘ 그에게는 남다른 아우라가 있다’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한다. 형용하는 그 대상에서 어떤 카리스마를 느끼거나 경외감을 느낄 때 사용하는 이 단어는 벤야민이 한창 활동하던 20세기 초, 예술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그는 과거와 달리 현대 예술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아우라가 몰락’ 한 것이라고 보았다. 과거의 예술 작품에서 ‘원본’은 확고부동하게 실존하고 있었고, 원본을 아무리 잘 복제해봐야 복제는 그저 복제일 뿐이었다. 사진은 실재의 복제지만 전체의 일부를 예술가가 선택하는 행위가 중요하므로 사진의 피사체가 원본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영화의 경우 수천 개의 극장에 필름이 복제되어 걸리지만 맨 처음 감독이 영화를 찍고 편집한 필름을 원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저 감독이 찍은 소스가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작품이 지닌  특유의 고고한 원본성과 일회성이 아우라를 만드는 요소였으나 재생산과 복제 자체를 예술 형식으로 하는 예술들 요컨대, 사진과 영화 같은 새로운 형식의 예술은 필연적으로 아우라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이 벤야민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이 시대에 벤야민의 말대로 미술작품에서 아우라는 제거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물론 미술작품 자체에 아우라가 있고 없고를 판단하기란 매우 주관적이고 일견 신비체험에 가까운 영역이라 확고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미술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을 믿는다. 관람객이 미술작품을 바라볼 때 감정적으로 강렬한 체험을 했다는 통계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관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미술 작품을 보고 울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 중 70%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단순히 큰 화면에 여러 겹 칠해진 색의 분할로 구성된 추상화일 것 같지만 직접 작품을 목도한 이들은 종교적 체험과 비슷할 정도의 숭고한 감동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국의 경우 김환기 작가의 대표작 <우주>를 예시로 들 수 있다. <우주> 역시 작품 자체가 가진 힘이 대단하다고 세간에서 평가하는 작품 중 하나다. 푸른 색조와 점묘로 이루어진 이 작품 앞에서면 설명하기 어려운 기운과 압도되는 감각을 받는다. 이 작품은 132억으로 국내 경매 사상 최고가에 낙찰되어 화제몰이를 했다.


마크로스코 <Light Red Over Black>, 1957(왼) / 마크로스코 <Black on Maroon>, 1958(오)
김환기 <우주>, 1971



모든 유명한 작품들이 작품 자체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이 시대의 환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아우라’는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1960년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회화의 종말’을 얘기했지만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꿋꿋이 회화작품을 그려내 부정할 수 없는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여전히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관객들이 현대미술에 요구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이런 아우라를 체험하는 경험을 인터넷이나 책자 속 도판 속에 복제되어 있는 작품을 보면서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유명 작품들의 실물을 직접 보기 위해 직접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 앞이 언제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인파로 가득 찬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