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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Sep 05. 2022

알레고리

#2




20세기 최고의 환상문학 중 하나로 꼽히는 <나니아 연대기>는 기독교적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옷장을 통해 나니아 세계로 들어간 주인공 네 남매는 세계의 창조주인 사자 ‘아슬란’을 만나고, 하얀마녀를 물리치기 위한 모험을 이어나간다. 도중 하얀 마녀의 꾐에 빠져 모두를 배신한 셋째 에드먼드를 구하기 위해 아슬란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나니아 세계의 창조주인 사자 아슬란이 죄 없이 수난당하고 희생하다 다시 부활하는 서사는 신약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고난 끝에 선이 악을 이기는 내용은 물론이고 (나니아 연대기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믿음으로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알레고리(Allegory)’는 쉽게 풀어쓰면 ‘다르게 말하기’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alos(다른)와 agoreuo(말하기)를 합친 allegoria에 그 어원이 있으며, ‘풍유법’이라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본뜻은 숨기고 비유하는 말만으로 숨겨진 뜻을 암시하는 수사법’을 말한다. 속담이나 수많은 관용어들이 이 알레고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글의 직접적인 의미 자체로만 보면 곧바로 '이미 잘못된 뒤에 손을 쓸 수 없다'는 의미와 연결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상황이 보여주는 특징이나 속성을 속뜻과 빗댐으로써 그 속뜻을 공감하고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비유 대상과 실제 대상이 1:1로 매칭 되는 ‘상징’과는 또 다르다. 알레고리는 좀 더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도 모호하다고? 또 알레고리와 현대미술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그런 의문을 가지는 당신은 옳다. 좀더 깊은 이해를 위해 우선 알레고리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중적인 그림을 가져와 보았다.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 혹은 <비너스와 큐피드가 있는 알레고리>로 불리는 바로 이 그림이다. 그림의 작가는 안젤로 디 코시모 알로리로, 브론치노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매너리즘 시기의 대표 화가다. 당시 후원을 받던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던 화가는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그렸고, 작품은 프랑스의 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로 바쳐졌다. 당시 유럽에서는 지성과 식견을 뽐내기 위한 일환으로 알레고리적 요소들을 작품 속에 배치하는 경향이 유행했다. 브론치노의 이 그림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작품 속에 배치된 모든 사물과 인물들에는 내포된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작품 왼쪽 중앙에 위치한 활을 메고 날개 달린 소년은 큐피드를, 황금사과를 손에 들고 머리에 왕관을 쓴 여인은 비너스를 의미한다. 신화 속에서 사랑을 관장하는 두 신은 육체적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이들 바로 뒤에서 달려오는 소년은 쾌락과 유희를 뜻한다. 소년은 짓궂은 표정으로 두 모자에게 장미꽃을 던지려 하지만 그 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육체적 사랑에 눈이 멀어 고통조차 잊고 쾌락을 향해 달려가는 사랑의 이중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소년 뒤에는 괴물의 몸을 하고 있는 무표정한 소녀가 서 있는데, 이 소녀의 이름은 기만이다. 소녀의 왼손에는 사랑의 달콤함을 뜻하는 벌집이 쥐어져 있지만 등 뒤에 숨긴 오른손에는 독충이 쥐어져 있다.


 이제 중앙 화면에서 외곽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화면 최상단 오른쪽에 파란 장막을 들고 모래시계를 뒤에 둔 노인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다. 그의 왼편에는 머리가 없는 젊은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마치 다투고 있는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시간의 신과 싸우는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해석은 그녀가 크로노스의 딸 ‘진실’ 이거나 혹은 ‘망각’을 뜻한다는 해석이다. 즉, 육체적 사랑에 시간의 장막이 걷히면 진실이 드러나 사랑이 덧없음을 의미, 혹은 망각이 시간의 장막이 걷히는 것을 방해한다는 의미로 설명되며 사랑의 어리석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무려 500여 년 전 그림의 해석에 깊은 공감이 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랑 때문에 콩깍지가 낀 나머지 못 볼 꼴 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진실 혹은 망각 아래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하는 노파의 형상은 지금까지도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인물인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데 ‘질투’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그 당시 유럽을 휩쓴 무서운 병이었던 ‘매독’을 뜻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그림은 다양한 상징들과 내포된 다양한 의미들이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사랑에 대한 시적인 표현을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림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고, 관람객은 퍼즐 풀 듯 수수께끼를 맞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맞춰진 완성품을 제각기 얻는다. 물론 회화의 소재와 주제를 상징으로 가득 채워 알레고리화 하여 미술작품을 의미론 속에만 가라앉힌 매너리즘 시기의 미학을 오늘날 현대 미술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알레고리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결합하여 좀 더 난해하고 파편화된 의미로써 기능한다.


  알레고리 개념을 인식론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이는 현대 미학사에서 괄목할만한 족적을 남긴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 이전에 알레고리 개념은 상징에 비해 비교적 낮은 단계의 문학 수사적 표현으로 인지되었다. 상징은 형식과 내용이 합일되어 틈이 없는 상태인 반면,  알레고리는 형식과 내용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다양한 의미로 해석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네잎클로버를 떠올릴 때 네잎클로버를 단순히 잎이 네 개 달린 작은 식물이라고만 여기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의미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인식의 측면에서 틈이 없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반면 알레고리의 경우는 앞서 설명했던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의 예만 보아도 상징보다 그 의미가 훨씬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알레고리의 요소들은 자의적이고 다의적이다. 이 때문에 하나의 총체적인 진리를 보다 높은 형식이라 생각했던 과거 사람들에게 알레고리는 불완전하고 부정적인 표현법이었다.


 벤야민은 오히려 상징이 가진 총체성이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한다고 여겼다. 반면 그에게 있어 알레고리는 인위적이고 미화되어 있는 상징의 작용을 걷어내고 보다 비주류적이고 비합리적,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해 현상을 바라봄으로써 보다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개념이었다. 이는 곧 정과 반의 개념을 상호작용 시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다 보면 상승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헤겔식 변증법의 의미와도 직결된다. 알레고리가 현상이나 존재가 함의하고 있는 여러 의미를 연관되게 읽어냄으로써 숨겨진 세계의 이면을 깨닫는 훌륭한 방법론으로 작용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 아래 알레고리는 그 해체적 성향에 매우 잘 들어맞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대 미술에서는 오브제가 전통적으로 갖는 상징과 이미지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미국의 팝아트 거장인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라우센버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침대>는 작가 자신이 실제로 사용하던 낡은 퀼트 침대보를 나무틀에 끼우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해 완성한 작품이다. 또 다른 대표작 <모노그램>은 캔버스 위에 염소 박제에 끼운 폐타이어를 고정시켜 놓고 캔버스 위를 칠했다.  일명 ‘콤바인 페인팅’으로 알려진 라우센버그의 이러한 표현법은 전통적 미술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면서 공산품과 비주류적 도시 부산물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알레고리적 작업이었다


 

 실생활에 사용되는 침대보, 우산, 폐타이어 등의 오브제가 직접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숭고한’ 미술의 경계가 무너지며 일상이 곧 예술의 표현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오브제를 캔버스 화면 위에 콜라주 하는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페인팅’은 2차원적 표현 방법인 회화의 영역과 3차원적 표현 방법인 조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보다 새로운 차원의 표현방식으로 미술의 영역을 진일보시켰다. 이렇게 새롭게 제시된 개념과 표현방식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표현과 사고의 범위를 한층 넓어지게 만든다.


오늘날의 미술에서도 기존의 가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는 수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편견을 깨는 파격과 관습을 깨고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낯선 경험이 아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해수욕장 옆에 뜬금없이 놓인 거대한 화분이나 미술관에 놓인 쓰레기(로 종종 착각되는 작품)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신선함과 의외성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야말로 현대미술의 매력이자 묘미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미술의 드넓은 대양을 헤매는 우리에게 알레고리적인 표현과 인식은 미술을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가치 속에서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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