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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을 Apr 25. 2023

봄비, 벚꽃 그리고 타마고산도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평소 같았다면 하늘을 원망한 뒤, 침대에 누워 한참이나 뭉그적거렸을 텐데. 이번에는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여 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아침은 먹어야겠거든. 숙소에 놓인 비닐우산을 펼쳐 들고는 길을 나선다. 대로변 건너편에 보이는 편의점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길래 한 컷. 여행 오기 전에 산 새 신발을 신었지만, 나는 물에 젖고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일부러 웅덩이에 텀벙. 


어제와는 다른 길을 선택해 걸어보기로 한다. 대로변은 아니다. 그렇다고 골목길도 아닌 듯하다. 오가는 차가 많지 않지만, 벚나무 가로수 너머로부터 자동차들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젖은 노면을 거침없이 밟으며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반갑다. 

출근길 자동차 행렬이 정지 신호에 멈춰 선다. 주변의 다른 소리들이 조금 더 명확하게 섞인다. 수양버들의 맥아리 없는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부대끼는 소리.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한 손으로는 능숙하게 우산을 들고 지나는 소리, 내가 들고 있는 투명한 비닐우산에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는 소리. 


구글 지도를 열어 목적지를 살핀다. 꽤 멀다. 2킬로미터면 택시를 타도 될 정도였겠는데. 헛웃음을 짓고는 다시 걷는다. 이참에 봄비나 더 즐겨보자는 심산이다. 일부러 골목길을 향해 방향을 돌린다. 시라카와의 얄브스름한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 그 위로는 여지없이 벚꽃이다. 이미 초록빛 새싹을 움튼 나무들도, 이제야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나무들도 보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 길을 오가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때를 틈타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이들도 눈에 띈다. 행인 1과 행인 2. 그리고 주인공 같은 커플과 사진사. 그들의 모습이 흔치는 않았는지 행인 3, 4, 5 무리가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본다. 가족일지도 모르겠다. 행인 6쯤 되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타츠미바시 쪽을 바라보며 걷는다. 물방울이 맺힌 비닐 우산 너머로.


타마고산도 몇 조각 먹겠다고 출발한 모험은 자꾸만 차질을 빚는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곳에 벚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질 않나, 마치 의도했다는 듯이 완벽한 프레임의 포토존이 등장하지를 않나. 거 참 밥 한 끼 먹기 정말 힘들다. 어쩌겠나.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야마모토 킷사. 지극히 일본의 소도시다운 분위기의 이 카페는 알게 모르게 유명하단다.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줄 서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테이블이 몇 개 없지만, 그래도 구석에 딱 하나 자리가 남아 있다. 조금 기다려서라도 창가 아니면 카운터에 앉고 싶다며 눈빛을 보냈지만 기각. 직원의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에 이기지 못한 채 안내를 받은 자리에 앉는다. 


영어로 오믈렛 샌드위치라고 쓰인 메뉴('Tamago Sando'라고 썼어야지!)를 가리켜 주문한 뒤, 다들 그러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본다. 카운터에 앉아 빈 커피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신문을 읽는 노파, 아이들과 함께 조금은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즐기는 가족, 바깥의 감성 어린 풍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휴대전화만 만지고 있는 한 여행자. 체크무늬 벽지인 줄 알았던 것은 테이프를 격자로 붙여 꾸민 것이었고, 아무렇게나 놓인 소스 통도 왠지 모르게 인테리어의 한 요소일 것만 같다. 로스팅 기계는 진짜 쓰는 걸까. 저 작고 오래된 게임기는 어딘가 좀 익숙한데. 


전기포트에 담긴 커피를 컵에 따라 내어준다. 설탕 스틱과 우유도 곁에 둔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는 차가운 우유 몇 방울에 마시기 적당한 온도가 된다. 고소하다. 설탕은 없어도 되겠다. 아직 몽롱하면서도 피곤한 기운을 털어내려면 약간은 쓴 커피가 괜찮지. 

타마고산도 한 접시가 눈앞에 놓인다. 보기만 해도 부드러운 식빵 사이에 폭신하게 생긴 달걀 덩어리가 끼워져 있다. 옆에 양배추를 썰어 만든 샐러드도 접시 한쪽에 자리하지만, 관심사 밖이다. 네 조각의 타마고산도 중 하나를 골라 한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부드러움이다. 특출난 맛도, 향도 없다. 커피와 어울린다는 것쯤은 알겠다. 


타마고산도 조각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이곳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리도 여유로워 보였는지, 왜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은 것인지.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감, 묘한 적막, 고요. 지극히 현실적인 창밖 풍경. 비 때문인지 촉촉한 공기, 무심한 듯 배치된 인테리어 소품들까지도 지금의 이 감정선을 위한 의도가 담긴 것들일까. 조금씩 이곳에 스며든다. 


동네에 이런 카페 하나쯤 있다면 좋겠다. 눈 비비면서 모자 눌러쓰고, 후드짚업 하나 걸친 채 찾아가서 찐한 커피에 타마고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거지. 안경을 살짝 콧등에 걸쳐 쓰고는 슬리퍼를 반쯤 벗어 발가락 끝에 걸친 뒤 툭툭 치면서 신문이나 잡지 같은 걸 읽어도 좋겠다. 카운터를 독차지하고 있는 저 할머니처럼. 




야마모토 킷사(やまもと喫茶)

- 위치: Kyoto, Higashiyama Ward, Ishibashicho, 307-2

- 영업시간: 07:00~17:00 (화요일 휴무)

- Cash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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