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르 닮은 안드리에, 바이엘 아저씨, 그리고 바리스 할아버지와의 첫만남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기
넓고 큰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의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벽 꽤 높은 곳에 붙어있는 전광판에 내가 타야 할 기차 번호가 쓰여있었다.
007-HoBocn6npck-12:10-?
'물음표?'
아, 아직 탑승구가 정해지지 않았나 보다.
드디어 탑승구 번호가 물음표를 대신하니 사람들이 큰 문으로 우르르 몰려 나가, 긴 열차의 칸 마다 줄을 섰다. 뭐 하나 확실히 준비해 온 게 없는 나는, 내가 보고 있는 티켓에 적힌 숫자가 내가 좌석이 있는 기차 칸을 의미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줄을 서 계시는 불곰을 닮은 아저씨께 도움을 청했다.
"이즈비니쩨, 에토프라븰노?"
내가 내민 종이 티켓을 유심히 살피시다가 러시아 말로 후르륵 대답하셨다.
나는 눈치껏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냐 이건 좌석번호이고 너는 여기를 찾아가야 해."
" 아! 스파씨바!~"
드디어 퍽 기대하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드디어 몸을 실었다.
칸마다 나있는 큰 창으로 빛이 들어와 침구류에서 난 듯한 먼지가 반짝 거리는 듯했다.
4개의 침대가 있는 편과 2개의 침대가 있는 편 사이에 난 좁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다닥다닥 붙은 침대칸 중 내 자리를 찾았다. 4개의 침대 주인 중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듯했다.
(네 명이 함께 지내는 쪽이 더 재미있을 거란 생각에 4개의 침대 중 왼쪽 일층 침대를 예약했었다.)
자주 쓸 물건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침대 아래에 넣어 봉인했다.
곧이어 러시아 아저씨 두 분이 나와 같은 침대칸으로 들어와 간단한 짐을 푸셨다.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행선지가 같은 아저씨들이었다.
가는 내내 나, 아저씨 둘, 그리고 구글, 이렇게 넷이 대화를 했다.
오후 내내 1층 테이블에 모여 앉아 나, 바이엘, 안드리에 아저씨, 그리고 구글 이렇게 넷이 수다를 떨었다.
두 분은 나와 같이 하바롭스크역에서 내릴 예정이셨다. 그곳에서 고향집이 있는 모스코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이라 하셨다.
아저씨들은 나에 대해 몹시 궁금해하셨다.
"저는 한국에서 왔고 대학생이에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주일을 지냈고 다음 목적지는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카잔, 모스코, 상트페테르부르크예요."
"공부하러 러시아에 온 거니?"
"아뇨! 여행하러 왔어요. 아, 근데 이것도 저에게는 공부예요."
수상한 알약
횡단열차에 타는 승객들에게는 무료로 컵과 티스푼이 제공된다.(물론 대여이며, 구매할 수도 있다.)
안드리에 아저씨는 어디선가 내 유리컵에 뜨거운 물을 받아와 주셨다. 열차에서 생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 리 없는 나는 스파시바를 연신 외쳤다.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곧이어 홍차 티백을 컵에 넣어주시기까지 했다.
홍차가 스멀스멀 우러나오는 중에 안드리에 아저씨가 가방을 뒤적거리시더니 수상한 작은 플라스틱 통을 꺼내셨다.
"이거 넣을래?"
"이게 뭔데요?... 괜찮아요.."
"아니야! 넣어먹어!"
퐁당퐁당퐁당 세 알의 흰 알약 같은 것이 떨어져 유리컵 바닥에 가라앉았다.
내심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내게 나쁜 것을 권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됐다.
"이게 뭔데 그래요~"
"마셔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한 모금을 홀짝인 후, 잠깐이나마 안드리에 아저씨를 경계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것은 귀여운 모양의 설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바리스 할아버지가 탔다. 비로소 4개의 침대가 채워졌다.
바리스 할아버지는 친절하고 다정하셨지만 표정은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하셨다.
예약할 때 미리 결제한 침대보와 이불솜, 베개, 그리고 커버를 차장님이 직접 돌아다니며 나눠주셨다.
내가 베개 커버를 베개에 씌우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자, 바리스 할아버지께서 척척 해결해 주셨다.
이불보를 정리하는 방법도 이때 배워 훗날 러시아 도시를 옮겨 다닐 때마다 능숙하게 커버를 씌울 수 있었다.
1. 커버를 뒤집어 그 속에 팔을 깊숙이 넣고 양 끝 모서리로 손을 위치시킨 후
2. 이불솜 양쪽 모서리를 단단히 잡고 휙-하고 커버를 뒤집는다.
3. 커버가 전체를 덮을 후 있게 잡은 모서리를 높이 들고 탈탈 털어준다.
"이불솜도 이렇게 넣으면 되는데, 덥지? 그냥 이불 커버를 이불로 써!"
어느새 우리는 구글 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저녁 10시, 밀린 일기를 쓰고 사진을 정리하니 소등 시간이 되었다.
인생 첫 시베리아 횡단열차,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풍경.
앞으로의 여정도 퍽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