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낭만적인 모스크바
복숭아 밥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복숭아다.
하지만 이것을 밥에 올려 먹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카우치서핑을 하며 만난 친구들 덕분에
입맛과 취향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걸까.
복숭아에 오트밀을 비벼 먹는 것이
밥에 김치보다 당기는 음식이 되었다.
오늘은 내가 리샤에게 아침을 차려줬다.
이름하여 ‘복숭아 카샤’
따뜻하고 포근하고 달큰한,
딱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 맛이었다.
LAZY Day
어제 무리한 탓에
오늘은 리샤네 집 반경 10미터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햇빛도, 구름도, 바람도 그저 창밖으로 감상했다.
오전에는 혼자 집에 남아 운동을 하고
리샤가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식탁에 마주 앉아 수다를 떨었다.
계속해서 침대, 부엌, 소파, 또 부엌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수다를 떨었다.
여행을 하며 만난 러시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한국 사람과는 다르게 참 자유롭다는 것.
꾸미거나 감추지 않고,
억지로 맞추지도 않고,
사람을 분석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게 나야’ 하고 보여줄 뿐인데,
그 모습이 자연스럽고 솔직해서
오히려 나를 편하게 만든다.
밤 10시 쿠킹
식탁에 앉아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러시아 전통 수프를 만들기로 한 우리.
닭뼈를 우려 육수를 내고,
채소를 손질하고,
국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고 나서야
"아 근데 가장 중요한 양파가 없네???"
한밤중에 집 앞 동네 슈퍼까지
양파를 사러 다녀온 끝에
완성된 뜨끈한 클레오츠키.
지금까지 먹어본 수프 중 최고였다.
한국 가면 꼭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맛.
매진
볼쇼이 극장에서의 발레 공연은…
결국 보지 못했다.
예약 시스템 오류로 티켓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뒷 타임 오페라 잔여석이라도 노려봐야지 싶어서
창구가 열릴 때까지
카페에서 시간을 떼우기로 했다.
카페에서 고른 클래식 머핀과 쿠키.
그 안엔 러시아 전통 잼… ? 스구셩카가 들어 있었다.
(먹어본 사람만 아는 갈색 조청과 비슷한 맛)
그 맛있는 머핀을 음미하는 동안엔 몰랐다.
커피 한 모금을 생략하고 일어났더라면…
또 매진
"오아~~~~~스파씨~~~~바~~"를 연신 외치며
룰라랄라 매표소를 빠져나가던
불곰 아저씨 바로 뒤에는
내가 서있었다.
매표소 아주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다.
"에구, 방금 아저씨가 가져간
저 티켓이 마지막이야."
발래도 오페라도 놓쳐버렸다.
극장 앞 분수 벤치에 앉아
흥얼거리며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 어쨌든 오늘도 좋은 하루였다.
리샤와 함께한 시간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 다시 만난 것처럼
편안하고 따뜻했다.
같이 식탁에 앉으면
홍차 네 잔쯤은 너끈히 비워냈고
그 속에서 오고 간 대화들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주말에만 볼 수 있다는
앙뚱한 매력의 리샤의 천사와도
인사하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볼 때마다 코를 톡톡 건드리면
으아! 소리를 내면서도 좋아하는 귀여운 친구였다.
모스크바에 있는 내내 하늘이 흐렸다.
크램린이 빛을 듬뿍 받아 빛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고,
어두운 하늘 대신 푸른 하늘이
사진의 배경이 되었다면 더 좋았겠다.
하지만
흐린 오후 뒤에는 몽롱한 해질녘이 있었고,
완전한 어둠은 모스크바의 화려한
밤풍경을 돋보이게 했다.
나의 첫 모스크바는
따뜻하고 낭만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