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내가 나아질 수 있도록 '내가' 돌봐주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따로 있다.
우리가 흔히 나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것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사랑한다."라는 문장구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의 내'와 '나를의 나'는 다른 것이다. 존재적으로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내'와 '나'는 무엇을 의미할까?
'내'는 현재의식이다. '나'는 무의식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누군가에게 존중받지 못해 상처를 입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상처를 입은 것은 무의식이다. 실제로 수치심, 분노, 당황스러움 같은 감정들을 체험하고 있는 체험의 주체는 무의식인 것이다. 그럼 그동안 현재의식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재의식은 무의식이 고통을 다 감당하고 있는 동안 그 고통이 싫어서 도망가 있다. 이를 '해리'라고 한다. 모든 대미지는 무의식이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도망을 가려면 무의식이 고통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식은 '인식'하는 주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정리해 보자.
무의식=체험하는 나=글을 읽는 나
현재의식=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나=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나
위의 구조가 성립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고통을 받았을 때, 그 대미지는 무의식이 다 받았기 때문에 무의식은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그 고통에 대해 현재의식에게 알리려 한다. "여기에 외면해서는 안 되는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니까 이것 좀 마주하고 알아줘!"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정신분석에서는 증상 또는 신경증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식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이 이렇게 "여기에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무의식의 대화요청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억압한다. 즉, 방치하거나 컨트롤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배가 너무 아파서 엄마 또는 아빠한테 "저 배가 너무 아파요..."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때마다 부모님이 내가 아픈 것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면서 "그냥 눈감고 자!"라고 윽박을 지르거나 무시한다면 나는 어떻게 느낄까? 우리가 무의식을 위와 같이 대할 때 무의식이 우리에게 느끼는 감정이 딱 이러하다.
그렇기에 자기 사랑이란, 무의식을 컨트롤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를 위한 방법이 바로 내가 나의 글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컴페션'이다. 컴페션에 대한 설명은 다른 글에 이미 많이 해왔으므로 생략한다. 컴페션을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의식이 무의식을 컨트롤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의식의 상처 낫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컨트롤하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말로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괜찮아졌으면 하고 기원(기도) 해 주는 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자기 사랑을, '내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착각한다. 그럼으로써 범하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실수가, 아프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돌봐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아프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돌봐주는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교묘한 점이 있다. 바로,
"내가 이렇게 나의 상처와 마음에 관심 가져주면 얘가 더 이상 아프다고 안 하겠지? 이제 치유되겠지? 그럼 더 이상 나는 얘가 아프다고 찡찡거리는 소리에 고통받지 않을 수 있겠지?"라는 전제가 아주 교묘하게 깔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플 때 어떻게든 그 아픈 마음을 아프지 않게 만들려고(컨트롤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컨트롤 행위 자체가 자기 사랑이 아닌 아주 교묘한 자기부정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상처는 회복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내가(현재의식) 상처를 낫게 '하려는'(컨트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적극적으로 체험하면서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또는 치유를 바라더라도 나아질 수 있도록 '기원'(제 3자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그때 상처는 '결과적으로' 회복된다. 그리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체험하며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기원(컴페션 '부탁')하는 것을 다른 말로하면 '현존'이라고 한다.
즉, 상처의 회복이란 상처를 '내가'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나는 곁에서 함께 있어주며 그저 제 3자에게 부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컴페션에 대해 쓴 다른 글들이 있으니 그것을 본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트라우마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받기 전까지는 치유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존재함에 대한 열망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삶에서 반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컴페션이란 그저 이 트라우마가(느낌/감정/사고의 복합체) 있는 그대로 존재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행위이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매 순간 기도해 준다. 나의 존재성을 위해 기도해 준다. 내 생각, 감정, 느낌이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해 준다. 매일매일 그렇게 기도해 준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모님조차도 나의 연인조차도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나를 위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몇 개월 이상 꾸준히 이렇게 기도해 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해준다. 한두 번 하고 말겠지 했는데 한 달, 삼 개월, 일 년, 이년 줄곧 그렇게 기도해 준다. 내가 온전히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해도 괜찮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당신의 당신의 무의식이라면 과연 내(현재의식)가 나(무의식)에게 그렇게 해주었을 때, 그때도 나(현재의식)를 믿지 못할까?
'나'라는 것은 과거 경험의 집합체이다.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는 것은 내 삶의 서사에 내가 나를 위해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해 준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나'는 과거 경험의 집합체다. 나의 과거 경험이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진심으로 내가 있는 그대로 존재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준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는 어떤 존재가 될까?
신이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설령 신이 없더라도,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그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준 나'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무조건 적인 사랑의 정체다. 그 와중에 무엇을 체험하든, 그것은 개인이 개인의 신비로 그저 누리면 될 뿐일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