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가 아니라 발직한 집사가 되자> 중에서-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는 아이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개선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만난 책이다. 책은 190쪽으로 얇은 편이지만 내용만은 그 이상으로 묵직했다. 내 원 가정에서의 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가정을 이루기 시작한 단계부터의 나의 역할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나도 인에이블러(조장자)였는지 모른다. 아이 스스로 독립하기보다 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이 만든. 인에이블러란 ‘누군가를 도와주고 있다고 본인은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의존하게 함으로써 의존자가 자율적으로 삶의 과업을 수행하여 성장할 수 있는 기회들을 박탈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족에게 인에이블러였던 저자 안절린 밀러의 통렬한 반성과 개선 과정에서의 체계적인 실천 사항 등 모든 고백 하나하나 빠짐없이 내 뇌와 가슴을 두드렸다. 그중에 “그들은 내가 선택한 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 권리가 있다.” 이 말이 훅 들어왔다.
처음부터 자식에게 삶의 선택권을 준 현명한 어미가 있다. 상수리나무다. 혹시 도토리가 둥근 이유를 아는가? 어린 도토리가 엄마인 상수리나무 그늘 밑에서는 싹을 틔우기 어려우니 엄마에게서 더 멀리 떨어지도록 잘 굴러가라고 둥글게 생겼단다. 엄마 상수리나무는 알고 있었던 거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처음부터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자신이 낳은 새끼지만 그 작은 아이도 자신과 동격의 완전한 상수리나무라 인정했기에 멀리서 떨어져 건강한 나무로 자라기를 기도하며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담담하게 또는 듬직하게.
나도 상수리나무의 지혜를 닮고 싶다. 딸아이는 어떤 나무로 자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아이에게서 멀리 떨어져 빛을 쬐어 주는 태양이 되기로 한 이상 분명 밝고 건강하게 자라 자신만의 꽃과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거라 믿는다. 이제 보니 아이는 시크하고 독립적이며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고양잇과였다. 그런 아이를 개과인 내가 강아지 다루듯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이제는 나와 아이와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할 수 있을 것 같다. 발랄하고 듬직한, 줄여서 발직한 집사와 까칠한 고양이. 새로운 직책이 참 마음에 든다. 집사가 된 기념이자 좋은 집사가 되기 위한 다짐으로 다음 노자의 명언을 큰소리로 읊어본다.
내가 간섭하지 않으면,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돕는다.
내가 지배하지 않으면, 그들이 스스로 바르게 행동한다
내가 설교하지 않으면, 그들이 스스로 개선한다.
내가 강요하지 않으면, 그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
나는 지금 사춘기 고양이를 둔 집사다. 그 어떤 간섭도 지배도 설교도 강요도 냅다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정신 줄을 놓고 이 중에 한 개라도 했다가는 바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하악질을 하는 모습과 맞닥뜨려야 한다. 이때 집사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아이의 분노와 공격성을 받아주는 거다. 『몸이 나를 위로한다』에서 남희경 심리치료사가 한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긴다. “아이는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분노가 온전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더 이상 그것을 억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수용할 수 있다.” 자녀의 공격성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내면에 원인 모를 분노를 안고 심리적 불구가 되어 온전하게 성장할 수 없다. 그걸 몸소 체험한 엄마이니 그 같은 심리적 대물림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집사에게 꼭 필요한 건 ‘심리적 멧집’이다. 몸집은 작고 약하더라도 마음만은 ‘마동석’쯤 돼야 하지 않겠는가. 불시에 들어오는 아이의 잽을 여유 있게 받아주고 얼굴에는 귀여운 미소까지 지을 수 있게 말이다. 가정에서 제대로 분노가 받아들여지면 아이는 더 이상 외부에서 분노를 표출하거나 반대로 심리적으로 의존할 대상을 찾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엔소니 드 멜로 신부님이 『행복하기란 얼마나 쉬운가』에서 주장한 ‘교육이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첫 번째 혜택’으로써 두 가지 요소, 즉 ‘혼자일 수 있는 능력’과 ‘자기 눈, 머리, 가슴, 생각, 느낌을 신뢰하는 용기’를 가정교육에서 자연스럽게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인에이블러 부모 말고 발랄하고 듬직한 집사를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