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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Oct 09. 2022

1단계. 검증된 시 뷔페에서 다양한 시 맛보기

-<4단계 방법으로 시랑 친해져 보는 건 어때요> 중에서-

   당신만이 지니고 있는 그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겠는가? 자신의 내면에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고 마는 소리를 어느 곳에 담아두겠냐고 묻는 거다. 사실 바쁜 일상에서 불현듯 찾아왔다가 예고 없이 가버리는 생각을 잡아놓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던 일을 멈추고 노트에 잽싸게 적어놓아야 하니 굳이 불필요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그때 든 생각이 슬픔이나 연민, 분노, 증오, 수치심과 같은 고통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은 글쓰기 노동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인 것이다. 이는 나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호이자 내 안에 미해결 된 감정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그것들에 잉크를 먹여 글말로 노트에 풀어놓던지 리듬을 입혀 입말로 토해내던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괜히 애꿎은 타인에게 쏟아내고 후회하기 전에.         

 

  그런데 막상 노트를 펼치면 난감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거미줄을 뽑아내듯이 쭉 뽑아 쓰려했건만 생각의 실타래는 온데간데없다. 쓰는 사람으로 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된 것이다. 무엇이 우리 안에 있던 거미 본능을 되살릴 수 있을까. 일단 남이 지어놓은 글 집을 유심히 들여다봐야 한다. 이 집 저 집 구경하고서 마음이 끌리는 집에서는 오래 머물러 보자. 재료가 뭔지,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마무리는 어떻게 지었는지 보고 또 보는 거다.  

        

  지금은 ‘숏폼 콘텐츠’(1~10분 이내의 짧은 영상으로, 언제 어디서나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서 콘텐츠를 즐기는 대중들의 소비 형태를 반영한 트렌드) 시대다. 지난 10년 사이 사람의 평균 집중 시간이 8초로 짧아진 데서 기인한 것이다. 어쩌면 금붕어보다 못한 집중력을 지닌 지금이 그 집을 구경할 절호의 시간이지 않나 싶다. 그 집은 바로 숏폼(Short-form)의 전형, 시집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과학기술과는 전혀 무관하고, 바이러스 시대에 면역력에도 쓸모없는 시가 대체 웬 말인가 할 것이다.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퐁쥬는 ‘세상은 시를 통해 말문이 막힌 인간 영혼을 침범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어쩔 수 없이 로봇과 바이러스와 함께 공생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 시대는 말문뿐만 아니라 얼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인가. 이때 시가 우리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답답한 마음을 뚫고 말문을 열어 주리라.

         

  미국의 최고 시인인 메리 올리버는 『휘파람 부는 바람』에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이 능력이 발휘되어 나온 것이 시다. 인류애가 응축된 시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 준다. 어디 그뿐인가. 끊임없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는 시는 인간을 늙지 않게 해 준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에 따르면, 시들은 그 나라 국민의 영적 건강을 책임진다 했다. 그렇다면 시가 신체의 면역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어쨌든 시는 분명 쓸모 있다.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다른 시인들의 말들을 더 들어보도록 하자. 류시화 시인은 시로 납치하다』를 출간하기 전에 SNS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아침마다 올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누가 읽기나 하겠나 하고 의문이 들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해서 시를 읽고 감상평을 달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가 느낀 것은 ‘시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은 아직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시인 에머슨이 한 말을 빌려 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시를 읽어보지도 않고 스스로 시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면 그 누구도 다 시인이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좋은 시에 공명하고 자신의 영혼에 전해진 울림과 떨림을 손가락 끝으로 전달하고 싶다. 즉 자신도 그 순간 시인이 되는 것이다.     

  


 

  1단계. 검증된 시 뷔페에서 다양한 시를 맛보기         

  이제 슬슬 시를 읽고 싶다는 발동이 걸렸는가. 우선 시의 세계로 들어온 걸 환영한다. 그런데 어떤 시부터 맛봐야 할지 막막하지 않은가. 잘못 먹고 탈 나서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먹는 요리는 적어도 평타는 친다. 같은 맥락으로 이미 검증된 시들을 모아놓은 시모음집은 대부분 잘 읽힌다. 단지 취향의 차이만 있을 뿐.         

  

  특히 에세이 형식의 시모음집은 차려놓은 요리도 풍성하거니와 시 뷔페 주인장의 맛깔스러운 해설이 더해져 풍미가 일품이다. 어떤 시는 매워서가 아니라 그때의 마음을 너무 잘 위로해줘서 눈물이 쏟아진다. 그러고 나면 매운 낙지찜을 먹은 것처럼 개운하고 힘이 난다. 그런 시들을 많이 담아놓은 시모음집이 내게는 만화가 박광수 씨가 펴낸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이다. 그가 바라던 대로 삶에 지치고 사람의 온기가 필요할 때 읽으면 참 좋은 시들이다. 시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의 그림들은 사이드 디시로서 시의 품격을 더 높여 준다, 나는 울다가도 그의 사랑스러운 그림 앞에서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주객이 전도된 시모음집도 있다. 바로 내가 너무도 존경하는 장영희 교수님의 『생일』과 『축복이다. 모 일간지에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칼럼을 모아놓은 시 에세이집이다. 영미권 시인들의 시에 대해 거의 문외한일 때, 이 책 속 시들을 읽고 처음에는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나올법한 대사 같다고나 할까. 로미오가 창가에서 줄리엣에게 들려주는 세레나데 같기도 하고. 하여간 왼쪽에 배치된 영시와 오른쪽에 교수님이 번역해 놓은 시를 대조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솔직히 시보다 감상평과 같은 에세이 글이 더 좋았다. 그 시에 대한 장영희 교수님의 해설이 너무 궁금해서 뒷장을 넘겨 시보다 먼저 읽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분의 포근한 음성을 듣고 나서 앞으로 돌아와 시를 마주하면 태평양 너머에서 온 그 시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더불어 김점선 화가의 동심이 살아있는 말과 새, 태양과 나비, 꽃과 집 등의 그림까지 보고 나면 금세 마음이 순해졌다. 그러면 에밀리 디킨스의 시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처럼 낭송하게 된다.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라면서.     

      

  또 다른 영미시 에세이집으로 조이스 박의 『내가 사랑한 시옷들』도 시 못지않게 엮은이의 해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시를 먼저 읽은 뒤 인문학적 깊이가 더해진 해설을 읽고 나면 한 번 더 시를 읽게 된다. 고은 시인의 <그 꽃>의 시 구절처럼 혹시나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을 보게 될까 봐서. 나는 이 책에서 <한 가지 기술>이라는 시에 꽂혔다. 재앙처럼 보일 수 있는 상실을 이렇게 담담하게 쓰려면 도대체 어떤 체험을 했던 걸까. 미국의 엘리자베스 비숍이라는 시인에 대해 궁금해졌다. 다행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이라는 영화가 있어서 그녀의 사랑과 삶과 시에 대한 열정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본 뒤 시를 다시 읽으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위대한 시인은 한 편의 짧은 시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담을 수 있구나! 경외심이 들었다. 김사인 시인은 『시를 어루만지다』에서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일단 시 앞에서 겸허하고 공경스러워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마음의 문이 열리고, 한 편의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목소리와 빛깔과 냄새들이 나에게 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시를 읽는 행위는 명상과 닮아있다. 나를 낮추고 내 안의 오만함과 분별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지금 이 순간 그 시와 한 몸이 되는 거다. 시가 내 가난한 영혼을 구원해 주리라 믿으며.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 어쩌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인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 그래서 그에 대해 찾아보고 알아가는 것, 결국 한 사람을 더 깊이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속 시 구절처럼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 가면 후회할 ‘시 뷔페’를 소개해 볼까 한다. 정채찬 교수의『시를 잊은 그대에게』와 류시화 시인의 『시로 납치하다』이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하나의 주제로 관통하는 시와 영화, 대중가요, 소설, 그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융합하여 시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다채롭고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그의 현대시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왜 매 수업마다 눈물이 고일 정도로 감동했는지, 왜 한 편의 공연 예술을 보는 듯 느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책을 덮을 때쯤 나라면 어떤 시 수업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때쯤 아이유가 부른 김소월 시인의 <개여울>을 자주 듣고 있던 참이었다. “가도 아주 가지는 / 않노라시던 /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 날마다 개여울에 / 나와 앉아서 /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 가도 아주 가지는 / 않노라심은 /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한 사람이 개여울의 한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쓸쓸함과 애절함과 서러움 등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표정으로. 그 상실감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 앞에서 얼마나 슬프냐고 감히 물을 수나 있겠는가.


  줄리언 반스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둘이었다 하나 된 사람에게 상실이란, 빼앗긴 건 하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긴 것을 의미한다. 수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감정적으로는 말이 된다.”라고 말했다. 함께 나눈 시간들, 다양한 표정의 웃음들, 눈빛, 움직임, 침묵들 그리고 공간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거다. 그곳에 있던 나 자신마저도.  


  복효근 시인의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라는 시가 떠올랐다. “숨 쉴 때마다 네 숨결이, / 걸을 때마다 네 그림자가 드리운다 / 너를 보내고 / 폐사지 이끼 낀 돌계단에 주저앉아 /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내가 / 운다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 소리 내어 운다 / 떨쳐낼 수 없는 무엇을 / 애써 삼키며 흐느낀다 / 아무래도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그렇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빈껍데기가 되어 버린 내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을 억지로 삼킨다. 텅 비어버린 마음을 그렇게 무엇인가를 삼켜서라도 채우는 것이다. 다시 엘리자베스 비숍의 <한 가지 기술>이라는 시를 가져오련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그들과 함께 했던 도시도 대륙도 모두 잃은 상실의 대모 격인 그녀가 이렇게 다독인다.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 많은 것들이 잃어버리겠다는 의도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니 / 그것들을 잃는다 하여 재앙은 아니죠. // 매일 뭔가를 잃어버려 봐요.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 시간을 허비해도 그 낭패감을 그냥 받아들여요. /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그토록 많은 상실을 경험했음에도 마지막 연에서 그녀는 지금의 연인마저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반어적으로 내비친다. “심지어는 당신을 잃는 것도(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내가 사랑하는 몸짓) /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 재앙처럼 보일 수 있을지는 (써 두세요!) 몰라도요.”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했다고 해도 여전히 상실의 가능성 앞에서는 그저 쿨한 ‘척’하는 수밖에. 무슨 기술이 또 있단 말인가.

         

  문득 이 시의 마지막 마침표에서 심수봉의 <비나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하늘이여, 저 사람 언제 또 갈라놓을 거요 /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 거요 /...... / 생각하면 허무한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 하늘이여, 이 사람 다시 또 눈물이면 안돼요 / 하늘이여,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 줘요” 새로운 사랑 앞에서 설렘보다 상실의 두려움이 더 앞서는 그녀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는가. 이번만은 마지막이기를. 이번만은 절대 이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절한 기도.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지 않았다. 차라리 적극적이었다.  신께 소원을 비는 방법을 택했으니까.   

       

  여기 상실 앞에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하는 여인과 떨쳐낼 수 없는 무엇을 애써 삼키며 흐느끼는 여인이 있다. 분명 마음속으로 ‘아무래도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라고 되뇌고 있을 것만 같다. 바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이다. 어쩔 수 없는 이별 이후 여성 화가로서 어렵게 자신의 꿈을 펼쳐가고 있는 마리안느는 한 공연장에서  엘로이즈를 발견한다. 그녀는 원치 않은 결혼의 세계를 택해 귀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엘로이즈에게 클로즈업되고 연인과의 이별 후에 느꼈을 여러 가지 감정을 보여준다. 슬픔, 원망, 분노 그리고 체념과 같은. 마지막에 그녀는 살짝 웃는다. 기쁨의 미소다. 자신의 소원이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늘이여, 저 사람 한 번만 보게 해 줘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 거요.”라며 매일 밤 신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빠르고 격렬하게 흐른다. 아마도 그 격정적인 선율에는 가도 아주 가지는 않겠다는 뜨거운 약속과 재앙처럼 보일 수는 있으니 다 잃어버려도 나만은 굳이 잊지 말라는 절절한 부탁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을까.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설적으로 잃어버리지 않으면 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사실에 기대자. 상실의 슬픔을 뇌에서 자가 격리시키는 건 어떨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그 불씨가 삭아들도록 기다리자. 그래도 이따금 그 녀석이 울컥 올라오면 실컷 울어 버려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내 마음과 같은 노래를 틀어놓고. 청승맞다고? 우리끼리는 ‘애도 파티’라고 부르자. 좀 있어 보이게!  

   

  이렇게 영화를 끝으로 상실을 주제로 한 나의 어설픈 시 수업의 시나리오는 끝이 난다. 시모음집을 읽는 매력이 바로 이거다. 좌판에 깔린 예쁜 수공예 귀걸이들 중에서도 유독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손짓하는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 작품을 만든 작가마저 마음에 들면 그가 만든 다른 작품들도 괜스레 구경하게 된다. 분위기가 비슷한 액세서리가 있으면 그 작가에게 말까지 붙여본다. “작품들이 다 예뻐요. 이것도 선생님이 만드신 거예요?”       

   

  왜일까? 그 사람이 알고 싶은 거다. 하물며 작은 액세서리 하나를 만나도 이럴진대 내 마음을 두드리는 시는 오죽하겠는가. 그 시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나아가 또 다른 영역의 예술 작품으로까지 관심이 확대된다. 연상 작용이 일어난 거다. 내가 사랑한 시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제 류시화 시인의 『시로 납치하다』라는 레스토랑으로 옮겨보자. 그가 엮은 시 모음집은 진리다. 시인이 전 세계의 좋은 시를 찾아내어 번역해 놓은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섬세하게 받아내어 아름답게 시를 지어내는 오십육 명의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시 맛이 참 정갈하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영혼까지 씻기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이 레스토랑의 총지배인 격인 류시화 시인이 들려주는 품격 있는 해설로 시는 더 풍미가 있어지고 육질은 연해진다. 그래서인지 류 시인에 의해 숙성된 시들은 우리의 몸속 깊이 스며든다. 만약 시모음집 미슐랭 가이드가 있다면 별 3개쯤은 거뜬히 받지 않았을까.   


  또 한 편의 시가 내 몸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기어이 눈물까지 뽑아냈다.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 검푸른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하느라 쑤시고 / 갈라진 손으로 불을 지폈다. /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 사랑의 엄숙하고 외로운 직무에 대해” 로버트 헤이든의 <그 겨울의 일요일들>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에게 풀어야 할 숙제이고 상처다. 아직은 앎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은 진정 멀지만 그래도 끝이 보이니 다행이지 않은가.     


  『불구의 삶, 사랑의 말』에서 양효실 교수님은 성장은 나를 죽일 것처럼 가로막고 누르던 상처를 덧나게 하는 미적 반복의 행위를 통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본다면 시를 읽는 행위는 내면의 상처를 들춰내고 그 상처를 할퀴기도 하는 미적 반복 행위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서 발생한 고통은 통찰이라는 꽃을 피우고, 찰나의 순간에 또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된다.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 모음집 한 권에서 마음에 와닿는 한 편의 시라도 혹은 한 명의 시인이라도 발견한다면 기뻐해라. 그건 행운이다. 한 편의 시로 인해 뇌에서는 연상 작용이 일어나고 뇌는 춤을 춘다. 덩달아 우리도 춤을 춘다. 밥도 안 되고 돈은 더더욱 안 되는 그 쓸모없는 일이 우리를 웃게 하고 눈물 콧물을 쏙 빼게 한다. 카타르시스의 향연이다. 이 맛에 시를 읽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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