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슨 힘으로 살아갈까
영화 <조커>가 개봉되었을 때, 그의 이야기를 따르며 신봉하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사실은 기꺼이 싫어했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중 ‘새로운 서사를 찾아서’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도래할 것은 조커가 열망하던 세계, 즉 자연 상태다. 이 자연 상태는 정치 질서가 도래하기 이전, 즉 인류의 시원 상태로서의 자연 상태가 아니라 기존 질서가 대안 없이 회의에 빠졌을 때 도래하는 인공적인 자연 상태다.’
마음에 안 드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라는 게임 리스타트 같은 욕망을 나는 저열하다고 판단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든 하루를 조금 더 나아가게 만드는 힘을, 그리고 그것을 희망이라 믿고 내일을 살아낼 이들을 동경했다. 내가 여기까지 살아내도록 만든 어떤 습관의 힘은 이제 빛을 다했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희망을 믿었다. 그리고 그 순수함을 고상한 이상주의로 여기고 무시하는 태도가 바로 조커를 좋아하는 이들의 마음과 같기 때문에… 이름도 조커라니. 전세역전의 한 방을 노리는 트럼프 카드 게임의 감초. 언제 그것을 사용할지는 전략에 달렸지만, 조커마저 자기 손에 온 것을 우연이 아닌 온전히 본인의 실력이라고 믿는 그 아둔한 마음. 사회에 상처를 입었다면 보듬고 극복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끌어내리며 자신의 자존감을 올리려는 그 나약함을 나는 보듬어주고 싶지 않다. 누가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나 내기하며 그저 나열할 뿐인 마음가짐이 싫었다.
‘그러나 마치 오지 않을 것 같던 내일은 자연 상태에서마저 반복해서 오는 법. 앞날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을 때, 가장 난감한 것은 다음 날이 밝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책의 비유처럼, 수레에서 흩어진 사과를 주워담는 사람에게 경배한다.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수레를 엎어뜨리고는 정의라 부르짖는 자들에게는 환멸을 느낀다. 남을 고려해본 적이 없는 어떤 강자가 피해자성을 취하려 하는 행위에는 주저 없이 게으름의 라벨을 달아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레를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 시지프스스러운 끈기를 닮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