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차는 고가도로에서 벗어나 조금은 황량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오전 시간대였기에 주변이 밝았지만 어둡기만 하다면 딱 스릴러 영화에 나올법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인적 드문 시골길이었다.
자꾸만 외진 곳을 향하는 차 안에서 불안했던 나는 일단 차를 멈추고 차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길이 좁아져서 차 속력이 아까에 비해 확연히 줄었었기에 기회를 봐서 기어를 파킹으로 돌리고 차키를 뽑아서 차를 멈추면 될 것 같았다. 그 후의 일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일단 차를 멈추고 차로부터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
셋을 세고 나는 머릿속에 그렸던 계획대로 먼저 기어를 파킹으로 돌렸다. 차가 덜컹거리며 멈추었고 곧 이어서 나는 차키에 손을 뻗었으나..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나를 저지하기 위해 손으로는 내 머리채를 잡고 발로 내 몸을 차기 시작했고 나는 내 나름대로 저항하였으나 싸움이라기보단 일방적인 폭행에 가까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평소 운동에는 자신이 있었던 나지만 그가 이전에 무에타이를 배워 자신보다 훨씬 체격이 좋은 친구도 거품을 물게했다는 말을 들었었기에 내가 그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전의를 상실한 나는 저항은 했지만 그를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고 왜인지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랬다가는 괜히 더 맞게 될까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속 몸부림을 쳤으나 내 머리칼은 그에게 잡힌 그대로였고 그걸 잘라내지 않는 이상 내가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싸우다 머리채를 잡힐 때마다 느끼는데 정말 내 긴 머리칼이 원망스럽다. 내 머리가 그의 머리 정도로 짧았다면 과연 결과는 달라졌을까.
조수석에서 고개를 아래로 한 채 웅크리고 있는 나를 감싸듯 결박한 그는 내가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를 힘으로 뜯어서 던져버린 후 위에서 아래로 내 얼굴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상황에서 나는 크게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코나 입과 같은 약한 부분이 아닌 광대 부분을 맞았기에 타격이 덜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수차례 내 얼굴을 가격하며 그가 내뱉었다.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
주먹질이 잠잠해질 때 즈음이면 한 번씩 온 힘을 다해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내가 자꾸 탈출하려 하는 게 성가셨는지 이젠 그가 한 손으로 내 목을 졸라왔다. 양팔은 어딘가에 짓눌리고 결박되어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목을 졸리는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얼굴을 맞고 있을 때가 나았다. 정말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흐억.. 컼.. 끄억.. 꺽..."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찰나에 숨을 몰아쉬며 꺽꺽대는 내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정신이 또렷하지도 않았고 그저 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엄마는 평생 나를 내려보낸 것을 자책하며 살 것이다. 잘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나를 내려보낸 그 순간을 평생 후회하실 텐데. 안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젠 켁켁 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내 목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진짜 영화 같다. 어이없어. 나 이렇게 죽는 거야..?
정신이 희미해질 때 즈음 그는 내 목을 조이던 손을 풀었고 그렇게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이후에 그는 어딘가 고장난 듯 덜컹거리는 차를 몰고 더 외진 곳으로 향하며 저수지처럼 보이는 곳에 돌진해버리겠다는 둥 같이 죽자는 식의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의 말들에 적당히 대꾸를 해주며 반쯤 체념한 듯이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그 말들 중에는 같이 죽자는 협박도 있었고 나를 돌려보내면 이제 자신은 경찰서에 가게 되지 않느냐는 염려도 있었고 지난 주식투기로 진 빚 중 절반은 자기가 번 돈으로 갚았다는 변명인지 합리화인지 모를 말도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자신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연락은 일절 하지 않을 테니 그저 자신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그 말인즉슨 빚을 다 갚으면 다시 만나서 결혼생활을 이어가자는 얘기였다.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알겠다고 했다. 집에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그를 기다려주고 헤어지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을 그의 부모님께 전화하여 말해달라 하였다. 그 당시 그가 그런 부탁을 한 이유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전화를 드렸고 뒤이어 그는 나로부터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거듭 받아낸 후에야 기차역으로 나를 바래다주었다.
기차역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기차를 타기 전 남는 시간에 우린 인근 토스트집에 가서 토스트를 먹으며 향후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그 기간 동안 매달 상환금액과 남은 대출잔액을 나에게 보고하겠다 하였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추가로 필요한 경우에 확인하라면서 그의 공인인증서를 내 휴대전화에 깔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알려주었다. 그 외에도 여러 말이 오갔으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단단히 일러두었던 조건은 단 하나 '상환내역 보고 연락 외에는 절대로 연락하지 말 것.'. 그 말에 그는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다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피가 말랐다. 알겠다고 해야 집에 갈 수 있겠지. 맞은 부분이 부어올라 토스트를 씹을 때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내 얼굴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약을 사주겠다는 그를 만류한 채 기차를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가 도착했고 나는 기차에 올라 기차 밖에 서있는 그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기차 문이 닫히며 나와 그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순간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감정이 온몸을 가득 메웠다.
'고마워.'
마지막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