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찌 보면 참 억울한 존재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가의 연속으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괴로운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유전적인 본성에서 시작해서 나이가 들면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순간마다 평가라는 족쇄를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이다. 모든 현상에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괴로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 괴로움을 인정 하든 하지 않든 매일 우리의 값을 헤아려 매기고 받는 행동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얼마 전 회사에서 팀원 한 분이 약속 없이 나를 찾아오더니, 느닷없이 전날 있었던 업무 실수에 대한 이유와 본인의 대처 그리고 결과에 대한 '평가'를 설명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적잖이 놀랬지만, 이내 숙달되어 있던 편안한 표정과 음성으로 최대한 평상심을 찾으려고 애를 쓰며 대화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던 이야기를 봇물 터지듯 쏟아낸다는, 뭐랄까.. 무엇인가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암묵적인 결과가 나와있는데 그것에 저항하고자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정의를 다시 내리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얘기를 나누는 내내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던가 하는 의문과 함께 전날 내가 일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계속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날 현장에서 내가 했던 말과 표정, 행동 그리고 결론을 내리는 절차는 정당하였는가? 하는 본인의 '평가' 말이다. 사실 그 일은 발생 즉시 말씀을 해주셔서 내용 파악이 되었고, 휴먼에러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이고 프로세스의 수정이 필요한 접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실수라고 생각하셨는지 풀이 죽어있던 팀원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 "문제없으니깐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업무나 잘해줘요!" 하고 다독여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보통 연말 연초 시기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한 해 동안의 목표 달성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숙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피라미드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본인들의 이야기들, 즉 평가를 꾸며내는 것에 굉장히 집중하고 민감하게 된다. 정말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연례행사처럼 우리는 이런 피 말리는 작업을 애써 스트레스까지 주고받아가며 해야만 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효과가 있는지 제대로 설명을 해줄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회와 조직에서 제대로 된 기준 없는 평가시스템으로 인해 받게 되는 감정적 소모에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다.
우리는 항상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평가를 한다'. 수직적이고 일원적인 평가의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싫든 좋든 평가를 주고받는 삶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이 삶 속에 녹아들면서 누구나 평가에 대처하는 본인만의 대응 방법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반응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평가에 반응하는 우리의 자세는 중요하다.
내가 만들어온 평가에 대한 행동반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학교에서는 선생님들로부터 받아온 수많은 평가와 성적표와 시험의 결과들. 현재는 사회에서 받은 평가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반응이 아닐까? 왜 하는지, 어떤 기준인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무엇을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공감하기보다는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통념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는 아닐까? 어떤 말 못 할 억울함이 있다.
다시 한번 평가란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 사람들을 왜 평가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나의 기준과 피평가자의 감정적 기준은 동일한가? 우리가 서로 공감하고 있는가? 아마도 나는 이 결과로 누군가에게 다시 평가받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평가받고 싶지? 합의가 된 평가인가? 설명하지 않으면 평가가 나빠질 것을 고민해야 하나? 나 또한 이렇게 되묻고 있으나 그 누구도 뾰족한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조직의 평가 시스템에서 반드시 개선이 되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와 조직이 평판과 명성을 만들어 쌓아 가는 시스템이라면?
영리만을 추구하지 않는 집단일수록 구성원들이 할당된 '역할' 때문에 평가를 주고받는 일이 많지는 않다. 목적을 뒤쫓는 과정에서 자발적인 선의로 봉사를 하거나 재능을 기부하는 행위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효율적 측면보다는 효과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효과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평판을 만들 수 있고, 명성을 쌓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회사나 영리 목적의 조직에 적용할 수는 없을까? 구성원들이 평가를 매기는 소모적인 프로세스에 구속받지 않고, 함께 평판과 명성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할 수 있다면? 어떤 한 조직이 좋은 평판과 명성을 가진다는 것은 곧 성과가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기여가 진정 원하는 성과의 필수 요소가 되는 것을 실험해볼 수는 없을까?
그것을 이끌어내려면 일원적으로 합의된 성과의 기준보다는 함께 좋은 평판과 명성을 만들어가는 시스템을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평가'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며 발생하는 구성원들의 감정 소모는 줄이고, 아껴놓은 에너지를 성과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로 활용하는 조직과 기업들이 앞으로는 더욱 경쟁력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하지 않게 접하게 되는 '평판과 명성'이 생긴 조직이나 기업의 선례는 충분히 긍정적인 자극이 되고, 사회적인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행하기 전에 그동안 평가받고 평가해왔던 자신을 먼저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본인 만의 합리적인 대응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퍼뜨린 씨앗으로부터 주변을 변화시켜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