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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미누나 Jan 10. 2023

아버지의 등

2022 좋은생각 청년이야기공모전 금상 수상작

아버지의 등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작은 공처럼 몸을 말고 계셨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영원히 깨지 못할 꿈을 자처해서 꾸는 것 같았다. 몇 날 며칠간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쏟아지는 잠을 탐닉하는 그 모습이 나는 왠지 낯설었다. 그의 등에선 난 아무 표정도, 언어도 읽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회사를 다녀온 뒤,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저벅저벅 옷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모습은 마치 스스로 우리 문을 닫고 들어가는 기력 없는 곰 같기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이제 막 흘러 내릴 것 같은 슬라임 같기도 했다. 


  당시 나는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터라 집 안 상황을 낱낱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즈음이었을까. 모두가 자는 새벽, 본가에 계신 어머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전화하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나를 먼저 걱정하셨다.


 “자다 깨운 것 같아 미안하다. 그래도 너한텐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유는 요즘 아버지의 행동이나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 퇴근 후 집에 오면 에어컨, 공기청정기를 트는 것을 금하시고, 핸드폰도 제대로 보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배달 음식도 절대 시키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셨다고 하니. 누군가 자신, 더 나아가 우리 가족을 도청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전주 주말, 가족을 태우고 운전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속도를 냈다고 했다. 그의 뒷모습은 결연했다. 온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마치 내일이 없을 것처럼, 세상의 끝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처럼,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말이다. 더욱이 일련의 미션을 통과해야 현재의 직위가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고, 부쩍 말투도 예민해지셨다고 했다. 대화라도 시도해보려고 하면 고개를 홱 저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고 했다.


  대학에서 사람의 몸과 마음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심리학’을 전공한 나는 단번에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인지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학부 때 배운 조현병적 증세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조현병(調絃病)’. 현악기의 현이 제대로 조율되지 못한 상태라는 뜻처럼, 망각과 환각이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왜 하필 나에게,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계셨다. “느이 아버지 무슨 일 생긴 거 맞지. 정상이 아니지. 어떻게 해야 하니. 정말.” 혼란스러웠지만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나는 어머니께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당장 제가 집으로 갈게요. 아버지 모시고 병원 가야 해요.” 초반에 대부분의 정신 질환자는 부인(否認)으로 자신의 말투, 행동을 정당화한다. 역시나 아버지는 당신은 정상인데 정신 병원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냐고 노발대발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눈물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내 말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시면서도 집이 떠내려갈 듯 울고 비는 나를 보고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따라나섰다. 워낙 딸바보인 분이라 사랑하는 딸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힘드셨을 테다. 당시 우리 집은 물에 적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버지의 병과의 지난한 전쟁을 시작한 느낌이었다.


  자취방을 빼서 본가로 들어온 뒤, 나는 큰 충격을 받은 어머니와 남동생을 살뜰히 챙겼다. 나라도 우리 집안의 정신적 가장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지만, 힘들다고 티를 낼 수 없는 시기였다. 병원 치료를 위해 회사를 잠시 쉰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냈다. 아버지의 병은 모두에게 큰 생채기를 남겼지만, 소중한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졌던 우리 집에 살며시 볕이 들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과 약물치료를 통해 아버지의 얼굴이 점차 밝아진 것이다. 회사와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시고, 가족들과 짧은 여행을 통해 일상의 균형을 되찾아갔다. 우리는 서서히 평범하고 단란했던, 행복한 일상을 향해 느리지만 한 걸음씩 내딛는 중이었다. 조금씩 나아지는 아버지를 보며 우리는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 함께 먹는 한 끼의 식사, 가벼운 산책 한 바퀴, 소소한 웃음이 있는 대화가 그토록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병세가 완전히 회복된 뒤, 회사로 돌아가셨다. 동료분들은 아버지의 복직을 축하하시며 파티를 열어주셨다고 했다. 어느 안온한 한낮, 장롱에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삑. 삑. 걸으면 소리가 나는 운동화를 신은 채 아버지의 손을 잡은 어린 나의 모습이었다. 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은 늠름하고 훤칠했다. 삼십 삼 년. 내 나이보다 긴 회사 생활로 아버지의 어깨는 많이 굽었고, 하얀 머리가 수북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얼마나 아버지가 홀로 우리를 짊어지기 위해 힘드셨을지 그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아버지의 얇아진 종아리가 그 모든 것을 대변했다. 동시에 가정에 무심했던 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에게 의지해 걸음을 걸었던 내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그 짐을 함께 지고자 한다. 나와 내 동생이 올곧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어머니가 가정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뒤에서 아낌없이 밀어주셨던 아버지의 책임감이 이제야 와 닿는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당연하기에 잊고 있었던 가족의 사랑 덕분에 우리 가족은 다시금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삑. 삑. 걸으면 소리 나는 운동화를 신었던 어린 나를 되새겨본다. 이젠 내가 아버지의 뒤에 서서 그의 발걸음을 응원하고 싶다. 물웅덩이 앞에서 잠시 멈춰도 좋고, 비가 오면 그늘 밑에서 피해도 좋으니. 다만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니. 

  아버지가 아프고 난 뒤, 우리 가족은 하루 한 번은 꼭, 집 앞 공원을 산책하는 루틴을 정해두었다. 여름과 가을이 줄다리기 하는 선선한 계절, 상쾌한 바람이 분다. 걸어가는 아버지의 등을 잠시 마주한다. 아버지의 등에서 이젠 표정을, 언어를 읽을 수 있다. 달려가 와락 그를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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