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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포그래피 야학 May 08. 2020

04_낱말사이

기록 중심에서 읽기 중심으로

일러두기

1. 앞의 글들을 우선 읽기를 추천합니다.

2. 본문 안에서 타이포그래피 용어는 띄어 쓰지 않았습니다.

3. 윤문이 되지 않은 글입니다. 



¶ 낱말사이

우리가 흔히 띄어쓰기라고 부르는 ‘낱말사이’는 ‘낱말’과 ‘낱말’의 간격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 컴퓨터가 익숙한 현재는 키보드의 ‘스페이스바’를 눌러 구분하는 간격이다. 낱말사이는 하나의 독립적인 ‘말’인 낱말(단어)을 구분하는 간격으로, 이는 하나의 온전한 의미를 구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낱말사이 덕분에 낱글자는 서로 결합하여 독립된 의미인 낱말이 된다. 이렇게 구분된 낱말사이는 독자에게 청각적 경험으로 감각된다. 낱말사이 덕분에 실제 타인이 말하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며 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글에 낱말사이의 존재한다는 것은 타이포그래피의 목적이 ‘기록’보다 ‘읽기’ 더 중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탓에 오래된 문자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낱말사이는 역사의 틈에서 뜨문뜨문 존재한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는 신 중심 사회로 문자는 읽혀야 하는 것 보다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그래서 낱말사이 없이 글을 기록하거나 성경을 필사했다. 이러한 탓에 중세시대는 낱말사이 없이 기록된 글을 읽을 수 있는 교육을 받은 특정 집단이 자연스럽게 권력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글을 읽는 것을 교육받은 사람들도 낱말사이가 없는 글을 이해하기 어려워 소리 내며 글을 읽었는데 그래야 의미를 이해하기 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세 상황이 구텐베르크 이후 점차 변화되었는데, 금속활자 인쇄가 상업적으로 활용되면서 책의 수요가 높아졌다. 그래서 독자를 배려하는 형태의 판짜기(조판, 組版) 방식이 중심이 되었고, 낱말사이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꼭 필요한 요소였다. 


시각언어의 입장에서 보면 ‘글줄사이’는 형태에 시각 기호의 ‘의미’를 만들고, ‘글자사이’는 시각 기호에 ‘가치’를 만든다. 그리고 비로소 ‘낱말사이’는 독자로 하여금 시각 기호를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문자의 목적이 ‘기록’인지 ‘읽기’인지에 따라서 낱말사이의 등장 여부가 결정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읽는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와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데, 문자가 읽기 어려울수록 권력은 제한된 집단에게 집중된다. 그래서 낱말사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오래된 비문이나 책에 낱말사이의 여부만 확인해 보아도 우리는 시대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낱말사이는 어느 정도가 간격을 갖는 것이 적당할까? 모든 공간이 그렇듯 낱말사이는 글줄사이와 글자사이 간격의 가교 역할을 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특정 공간이 넓어지면 다른 공간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아 넓어지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글자사이에 영향을 주는 기준들이 낱말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자사이에서는 글자의 속공간이 —한글에서는 첫닿자의 크기— 시각적 크기에 영향을 주어 적절한 글자사이 간격이 결정된다. 그럼 글자사이 간격에 따라서 낱말사이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아 결정되게 된다. 이렇게 결정된 낱말사이에 글줄사이도 영향을 받아 적절한 간격이 결정된다. 우리는 앞에 글줄사이에서 낱말사이보다 좁은 글줄사이는 흰 강 현상을 만든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처럼 어느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서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인지하는 형태는 모두 촘촘히 연결되어 시각 언어를 구성하기 대문이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작업의 콘셉트부터 글자사이와 같이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것들이다. 시각 기호는 형태와 형태가 연결된 복잡한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감각된 경험이다. 그래서 시각 언어의 의미는 언제나 맥락 안에서 결정된다.


다시 돌아와서 적절한 낱말사이 간격은 글자사이와 마찬가지로 글자꼴의 시각적 크기와 연관이 있고, 일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금속활자시대에 인쇄공은 낱말사이 간격을 일정하게 조절하기 위해 글자사이에서 사용한 분각 개념을 사용하여 조절하였다. 정방형 활자틀(em quad)을 4분각, 3분각, 2분각 한 것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라틴알파벳의 경우 시각적 크기와 글자사이를 고려해서 4분각 낱말사이를 주로 사용하였다. 한글의 경우 금속활자시대에는 2분각 낱말사이를 주로 사용하다가 사진활자와 디지털활자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차 현재의 3분각 낱말사이로 자리 잡았다. 금속활자시대에서 디지털 활자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차 좁은 글자사이 간격을 사용하게 되어 낱말사이 간격도 좁게 변화하였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글자사이의 변화는 낱말사이와 글줄사이에 영향을 미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제나 3분각 혹은 4분각 낱말사이 공간이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글자꼴의 형태적 개성에 따라서 낱말사이는 조금씩 차이를 갖고 세심하게 조절된다. 예를 들어 시각적 크기가 작아 보이는 글자꼴을 2분각 낱말사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천분각 기준으로 450/1000분각 정도의 간격을 갖기도 한다. 2분각은 500/1000분각 이지만 각 글자꼴의 형태적 개성에 따라서 시각적 간격을 달리 적용하기 때문이다. 3분각의 낱말사이도 물리적인 간격으로 약 330/1000분각 정도의 간격을 가져야 하지만 글자꼴에 따라 시각적으로 3분각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270~330/1000분각 까지 다양한 간격을 선택한다. 


¶ 한글 낱말사이와 시대적 인상

그렇다면 언제나 낱말사이는 라틴알파벳에서는 시각적으로 4분각, 한글에서는 3분각의 낱말사이를 가져야 하는가? 이는 대체로 그렇다. 대부분의 가독성을 요구하는 판짜기의 경우 관습적인 결과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타이포그래피의 목적은 가독성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타이포그래피를 통해서 다양한 의미와 목적을 시각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소해 보이는 본문 판짜기도 글자사이, 낱말사이, 글줄사이, 단락구분, 문자정렬, 글줄길이 등등 다양한 요소로 글의 의미와 더불어 시각 언어를 전달할 수 있다. 특히 한글은 라틴알파벳 타이포그래피 역사와 비교해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문자인 탓에 우리 삶 안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경험은 다채롭게 자리 잡고 있다. 글자사이와 낱말사이에 따라서도 우리는 다양한 시대적 인상을 경험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넉넉한 글자사이와 2분각 낱말사이는 금속활자를 사용하던 50~70년대의 시각적 느낌을 전달하며, 3분각 낱말사이는 사진활자와 디지털활자를 사용하던 70~00년대의 시각적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우리가 낱말사이에 대한 감각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분석하고 이해하고 있다면,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독자들에게 다양한 시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시각 언어의 의미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체로 디지털 시대 초기의 디지털활자를 보면 글자여백이 넉넉해 글자사이와 낱말사이 간격도 넓게 형성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금속활자와 사진활자의 영향 때문인데, 디지털 글자꼴 시대 초기에는 금속활자와 사진활자의 활자틀과 활자면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한글 디지털 글자꼴들이 출시되면서 점차 한글 가로 쓰기를 위한 활자틀과 활자면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21세기에 출시된 디지털 글자꼴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활자틀과 활자면의 크기와 비율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각각의 한글 디지털 폰트 회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활자틀과 활자면을 해석했는데, 글자꼴 회사들이 출시한 디지털활자의 활자틀과 활자면만 분석해 보아도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한글 디자인을 진행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접하는 다양한 디지털 폰트 중에는 다양한 활자틀과 활자면, 글자여백을 갖고 있는 글자꼴이 섞여있다. 금속활자나 사진활자에서 디지털로 전환한 초기의 디지털활자 글자꼴과 최신의 디지털활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작업자는 언제나 자신이 선택한 디지털활자의 형태적 개성과 배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 낱말사이 짜기

일반적으로 낱말사이는 글자꼴에 포함된 간격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작업자가 의도한 글자사이를 사용하거나 혹은 글자여백이 넓은 디지털 시대 초기 글자꼴을 사용하는 경우는 언제나 낱말사이가 적절한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의도에 따라 글자사이를 조절하는 경우 작업자가 입력한 글자사이 값(tracking)은 한 줄의 모든 글자사이를 조절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낱말사이 간격도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조절한 글자사이 뿐만 아니라 낱말사이도 의도한 것이지 따져봐야 한다. 또한 디지털활자 초기에 출시된 글자꼴의 경우에는 같은 글자꼴이라고 하더라도 낱말사이가 2분각과 3분각 구분되어 출시된 경우도 있어 꼭 낱말사이를 확인해야 한다. 작업자는 선택한 글자꼴 개성, 글자여백, 낱말사이 등을 이해하고 있어야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고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대체로 인디자인과 같은 DTP프로그램은 기본 설정된 낱말사이 값을 퍼센트(%)로 조절할 수 있도록 설정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언제나 직접적인 낱말사이 간격에 영향을 미치는 ‘권장 값(혹은 기본값)’ 이외에 ‘최소 값’과 ‘최대 값’을 입력하는데, 이는 문자정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글줄 한 줄을 판짜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양끝맞추기를 한다고 했을 때 한 줄을 모두 식자한 후에 글줄 끝이 일정하게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때 글줄을 끝에 맞춰 양끝맞추기 위해 활자들을 알맞게 벌려 놓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배자’라고 한다. 글줄 끝에 남아 있는 간격을 매워 양끝맞추기 위해 낱말사이를 벌이게 되는데, DTP 프로그램은 이때 작업자가 설정한 낱말사이 최소 값과 최대 값을 변칙변수로 활용하여 배자를 최적화한다. 이는 문자정렬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언제나 작업자는 자신이 원하는 낱말사이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며, 낱말사이가 글자사이와 글줄사이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해야 한다. 만약 좁을 글줄사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낱말사이 값을 다소 좁혀 흰 강 현상을 방지할 수도 있으며, 넉넉할 글줄사이에 낱말사이를 넓혀 글줄사이의 흰 공간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을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도 있다. 또한 낱말사이의 시대적 인상에 따라 독자를 과거로 이끌 수도 있으며, 읽는 것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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