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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Jun 19. 2024

사람을 좀 더 믿어보지 그래

오랜만에 전철을 탔다. 아들에게 차를 내주고 나서는 자주 전철을 타는 편이다. 자리만 잡는다면 전철만큼 편한 것이 없다. 버스처럼 멀미가 나는 것도 아니어서 읽고 싶은 글을 읽거나, 써둔 글을 고칠 때도 있다.

운이 좋게 전철의 한쪽 구석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최근 휴대폰에 깔아 둔 ott를 열었다. 이어폰을 꽂고, 가는 동안 드라마를 좀 볼 생각이다.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예능이며 드라마 보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나도 그걸 해볼 참이다. 기대가 된다.


한참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을 지난다. 아무래도 노인 같다. 다행히 노인은 내리는 문쪽으로 섰다. 그리 서 있다가 내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늘 탐을 내던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 40분 이상 더 가야 할 상황이라 노인이 그러기를 바랐던 거 같다. 하지만 노인은 문이 열리는데도 내리지 않았다. 망설이던 맘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노인에게 앉으시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노인이 소리친다.

“앉아!”


여전히 내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고, 귀에는 드라마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드라마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노인의 말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노인이 내게 소리를 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 때문에 노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앉으세요’라고 말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입만 달짝이는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고맙다는 말을 한마디 했다. 노인이 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이어폰을 꽂고 있던 차라 머쓱함이 덜했고, 크게 화가 나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몇 개의 역을 지나고 세 사람이 우루루 일어나 내렸다. 노인은 나에게 저기에 가서 앉으라며 손짓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도 30분은 가야 해서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으니 좀 여유가 생긴 건지 조금 전 노인이 내게 소리 지른 일을 찬찬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찜찜하게 남아 있었던 거다.


노인은 빨리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내가 미웠던 거 같다. 그렇게 양보하기 싫으면 그냥 있으라고 하고 싶었던 거 같다. 하지만 결국 양보하고, 자신의 투정을 나쁜 기색 없이 받아내는 내게 나중에는 고맙고 미안한 맘이 들었던 거 같다. 내가 앉을자리를 자기가 앉을자리처럼 찾아 챙겨주었으니 말이다.


전철을 타고 내가 가려던 곳은 엄마 집이었다. 엄마 집에 도착하여 나는 엄마에게 전철에 타면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마침 엄마 집에는 엄마보다 더 노인인 큰이모가 계셔서 두 분의 전철 타기에 대해 물었다. 두 분 모두 노약자석에 자리가 있으면 앉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한구석에 서 계신다고 했다. 노약자석이 아닌 자리 근처로는 서지도 않고, 시선도 두지 않는다고. 혹여라도 자신들이 자리 양보를 바라는 것 같아서 젊은이들과는 눈도 맞추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전철을 타고 이곳저곳 잘 다니는 큰이모는 출퇴근 시간 즈음에는 절대로 전철을 타지 않으려 한다고도 했다. 그게 다 젊은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거라고 더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그쯤 되니 노약자석이라는 것이 노인을 위한 것이 맞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이모는 노약자석이 아니면 시선을 옮기는 것도 불편해했다. 물론 그런 조심성을 보이지 않는 노인들도 많다. 젊은이들이 노인을 보고도 선뜻 양보하려 하지 않는 것에는 노약석을 두고 보인 일부 노인들의 횡포 때문이었다. 노인들은 혹여라도 노약자석을 차지한 젊은이를 보면 호통을 치곤 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세상 말종 취급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이건 말종 취급을 받은 사람뿐 아니라 전철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경험이 된다. 그런 경험이 노인에 대한 혐오와 노인을 노약자석으로만 몰아넣었는지 모른다.


노약자석이 없을 때도 많은 노인은 자리에 앉아서 이동했다. 노인을 미처 보지 못하면 누군가 ‘여기 노인 계세요’하고 알려주어 양보를 돕기도 했다. 이쯤 되니 제도는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는 거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람이 어울려 사는 세상의 정과 재미를 빼앗는 것도 같다.




최근 KBO에서 AI를 이용한 스트라이크 판정 제도를 시작했다. 주심은 AI가 알려준 대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소리 내어 알려줄 뿐이다. 간혹 AI이가 공의 궤적을 판단하지 못할 때만 주심이 판단을 내린다. 처음에는 이제 오심은 없겠구나 안심했다. 야구팬으로서 오심으로 승부가 갈리는 것을 보는 심정은 괴롭고 억울했다.

그런데 그런 야구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재미가 덜했다. 야구의 묘미에는 주심이 우렁차게 내지르는 스트라이크 소리도 있고, 팔을 돌려 삼진을 알리는 멋진 제스처도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AI이가 하고 보니 그것이 전처럼 극적이지 않았다.

또 투수의 공을 받는 포수는 미트질이라고 하여 주심이 스트라이크로 인식할 수 있게 공을 받아내는 것이 실력이 되곤 한다. 그것을 눈속임이라고 비난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야구 기술이고, 경기의 일부다. 그런데 AI제도를 들이고 나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삼진의 짜릿한 맛이 예전 같지 않았다.


선수들은 더 이상 심판의 판단에 어필하는 일이 없다. 심판이 내린 판단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로 재듯 정확하게 재는 AI가 내린 결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에 대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선수들의 아쉬워하고 억울해하는 표정에 같이 호응했던 관중들은 그 재미가 줄었다는 걸 확연히 느낀다.


이런 비슷한 이유 때문일까? 유럽 프로 축구에서 VAR제도를 없애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축구에는 오프사이드인지 아닌지 공이 손에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같은 중요한 순간이 있다. 그걸 판단하는 것이 심판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논란이 일곤 했는데 어느 순간 경기 장면을 찍은 영상을 통해 정확한 판단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VAR제도다.

그런데 이 제도를 도입하고 나니 경기의 긴장감이 줄어 재미가 덜해졌다. VAR 확인하느라 경기가 끊기고 경기 시간도 늘어버렸다. EPL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팀이 동의만 한다면 VAR제도를 없앤다고 한다. (결국 없애지 않기로 했다)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을 좀 더 믿어보지 그래’

세상에는 끔찍하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사람조차도 누군가 믿어주고 바라봐줬다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의 제도는 사람을 촘촘히 구분하고, 나눠서 제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젊은이를 믿을 수 없어서 노약자석을 만들었는데 노약자석이 생기자 노인들은 노약자석 외에는 어디에 앉아도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리 양보해 달라는 거 같아서, 한쪽 구석에서 창만 바라본다는 엄마의 말은 비단 우리 엄마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지친 젊은이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어르신이 계셨고, 자리를 양보받는 대신 무거운 가방만은 내가 챙기겠다는 어르신이 계셨다. 그런 맘을 알기 때문에 젊은이들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할 수 있었다.

제도로 사람을 가르치려고만 말고, 사람이 사람을 믿을 기회와 시간을 좀 주면 어떨까 싶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만든 제도가, 오히려 좋은 세상을 망칠 수 있다는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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