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제나 사람이, 삶이 궁금했던 거 같다.
어릴 적 동네 집들의 불빛을 보면 기분이 이상했다. 자라서는 아파트 창마다 켜진 불빛을 보아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그 빛을 보고 있으면 그 속에 누군가가 살고 있고, 살고 있는 누군가는 또 누군가의 엄마, 자식, 동생일 거라는 생각이 들면 이상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처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과 그들의 인생이 생소해서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늘 사람에 대한, 삶에 대한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술이 궁금할 때도, 음악이 궁금할 때도, 영화가 궁금할 때도 결국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화가의, 음악가의, 감독의, 배우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하며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안다. 어떤 사람도 한 가지 면만 있지 않다는 걸. '내 생각은 이래'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생각도 일부 담고 있다는 걸. 그저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생각을 좇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거기서 거기고, 사는 모습도 얼추 비슷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사람을 궁금해하며 책을 찾아보고 있다. 밑바닥은 비슷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서 말이다.
프랑스 화가 라울뒤피는 ‘삶은 내게 항상 미소 짓지는 않았지만 나는 삶에 미소 지었다’고 말했다. 미소만 가득할 수 없는 삶을 나도 미소 지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은 거다.
고갱은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고갱은 손에 상처가 나더라도 갇힌 유리창을 깨고 나가야 한다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고, 가난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 고갱은 상처도 많고, 무지 가난도 했던 화가다. 그의 이 말은 강한 의지 혹은 정신승리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저 그 한마디에 용기가 생기는 거다.
무엇이 되었건 난 책을 통해, 그림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거 같다. 난 사람이고 그래서 삶을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사람과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도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