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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고 싶다 04.

내 멋대로 아트 에세이

by 아난



유년기에 읽었던 책에 관한 이야기를 지인과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말했다. 책을 읽고 있으면 부모님이 좋아하셨기에 칭찬받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고. 그랬더니 상대는 ‘아, 그랬구나...’하며 진솔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난 당연히 ‘나도 그랬는데!’, 혹은 ‘그 시절엔 다 그렇지 뭐.’ 같은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남들도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히 아닌데 착각할 때가 많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은 그 시절의 나에겐 정말 중요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실속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칭찬이나 인정으로 실제 바뀌는 건 별로 없다. 얻게 되는 것은 약간의 만족감과 자부심 정도? 그렇게 목말라하고 애를 쓰며 얻어낼 만한 것은 아닌데 굳이 그런 게 배고픈 자들도 있다. 나처럼.


하지만 칭찬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하는 말 말고 진심으로 하는, 의심할 수 없는 그런 인정을 받고 싶었다. 못 미더운 나 자신을 믿고 싶어서 그랬던 걸까? 미술공부를 하던 학창 시절, 불태우듯 그림을 그렸던 큰 원동력 중 하나도 바로 그런 강렬한 인정 욕구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나는 선택을 받은 인간, 진정 재능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되던 안 되던 열심히 그렸다. 사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그림 그리는 것 밖에 없었기에 더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는 너무 서툴렀고, 성격도 소심했기에 외국인 친구가 먼저 다가와도 어버버 하다가 은근슬쩍 피해 가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하고 싶은 말들로 늘 들끓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창구가 그림밖에 없었다. 우연이던 필연이던 이로써 내가 그림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이 완성된 셈이다.


미술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1번 있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5시까지 장시간 수업을 받았다. 이 역시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특이한 수업방식이었다. 한국에서 미대 입시생은 미술학원을 거의 매일 가던가 적어도 일주일에 3번은 간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는 모든 것이 달랐다. 일주일에 1번 장시간 수업을 받고 숙제를 받아온다. 그러면 나머지 6일이란 시간에 걸쳐 집에서 숙제로 받은 작품을 스스로 연구해서 완성해오는 그런 시스템이다.


‘집에서 혼자 그린다고? 그럼 학원엘 왜 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아무튼 이렇듯 방법이 달랐고, 나는 의외로 내 몸에 딱 맞은 옷을 입은 냥 잘 적응했다. 그 전엔 뭔가를 혼자 생각해서 그림을 그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데생을 할 때에도 이젤 앞에서 그리고 있다 보면 어느덧 선생님이 뒤로 쓱 오셔서 ‘잠깐 나와 봐.’ 하시면 난 즉시 자리를 비켜 드린다. 그러면 선생님이 내가 쓰던 연필을 들고 내 그림 위에 즉석으로 그림을 수정하기 시작하신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그것이 내가 그 시절 경험했던 일반적인 한국의 데생 공부법이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캐나다에서의 방법이 더 뛰어나고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후진적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요즘 같은 시대에 결코 맞지 않는다. 분명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이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이런 과정이 습관적으로 반복될 때는 자기 작품에 대한 주체성과 책임감이 약해지고 타성에 젖게 된다. 캐나다로 와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는 감히(?) 내 그림에 손을 대는 선생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미술학원 수업은 주로 앞에서 언급했던 단시간 드로잉을 상당히 많이 했는데, 주로 사물을 보고 그리는 과정이 많았다. 기본적인 드로잉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선생님은 수업을 리드하셨다. 보고 그리는 사물은 대체로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동사니였다.


그렇게 기본적 드로잉 공부가 끝나고 나면, 앞에 앉아 있는 학우의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그리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느껴지는 영감이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비전을 그리는 과정도 있었다. 때론 인체 드로잉 (Life Drawing)도 했는데, 선생님께서 직접 누드모델을 섭외해오셨기에 난 덕분에 비교적 어린 나이에 누드모델을 접할 수 있었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은 누드모델을 보며 당황하는 기색도 보였지만 난 너무 좋았을 뿐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진정한 예술가가 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결국 당황하는 한 어린 친구 때문에 남자 모델은 반바지를 입고 포즈를 취해야 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누드모델을 그리는 일이 멋지고 폼 나는 예술가의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친했던 한국 친구에게 누드모델을 해달라고 청하기 이른다. 물론 홀랑 벗고 하는 것은 그녀 입장에서는 죽어도 못할 짓이고 어깨 죽지와 등을 드러내고 나머지는 얇은 이불로 칭칭 둘러싸 매고 포즈를 잡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구석에서 한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한 사람은 포즈를 잡았다. 당시는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대흥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극 안에서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누드화를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나도 근사하고 로맨틱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며 화가라는 직업이 정말 멋지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이런 시도를 하게 된 것은 아마 그런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 끓고 영화가 영화가 아닌 현실처럼 느껴지던 십대청춘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명작을 완성했냐고? 뭘 그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 거기엔 열정만 가득한 바보 아티스트와 그런 부탁을 들어준 순진한 천사만이 있었을 뿐이다.



경훈.jpg
재형.jpg
Kyunghoon, pencil, 15분 Jaehyung, pencil, 15분


순진했던 기억들은...




portrait with purple.jpg
Red portrait.jpg
Portrait purple, pencil, oil pastel, 10분 Portrait red , pencil, oil pastel. 10분


주어진 시간은 10분. 빠른 필치로 슥슥 그려나간다.

두려움이 없다.

망설임도 없다.





portrait brown hair.jpg
kyunghoon portrait.jpg
portrait brown hair, oil pastel, 30분 Blue face, pastel, 25분

Dreamy night, pastel on sketchbook











꿈많던 시절.

우리의 삶이 이런 순간들로 좀 더 채워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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