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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드로잉 03.

내 멋대로 아트 에세이

by 아난



낙서 같은 그림에도 급이라는 것이 있는데, 허술함 3급에 해당되는 것이 그냥 '단시간 안에 빨리 그리기'라면 허술함 2급이 '왼손으로 그리기', 허술함의 최종 보스 단계인 1급이 '스케치북 안 보고 대상만 보면서 왼손으로 그리기'이다. 이 마지막 단계는 한마디로, 시각은 대상(object)의 윤곽선을 따라가지만 정작 본인은 종이 위에 뭘 그리고 있는지는 모르는 초월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랄까. 아무튼 점점 갈수록 난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공간 능력이 좋은 학우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 내었다. 생각해보면 시각 장애인 화가도 존재하는 시대이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당시에만 해도 내겐 파격적인 드로잉 방법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모두들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던가.


왼손으로 그림 그리는 과정이 수업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선생님께서 시작하셨던 방편 중 하나인데 감히 추측 건데, 당시 ‘오른쪽 두뇌로 그림 그리기’ (Drawing on the right side brain)라는 책을 탐독하고 계셨던 걸로 보아서 우뇌를 활성시키는 드로잉 방법을 가르쳐보고자 마음먹으셨던 것 같다. 덕분에 이 왼손 드로잉은 매 수업시간 되면 가장 먼저 시작하는 연습 드로잉이 되었다. 본격적인 장시간 드로잉을 시작하기 전에 두뇌를 활성화시키는 과정이랄까.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간 것이 스케치북 안 보고 대상만 보고 그리기다. 왼손 드로잉은 형태는 매우 거칠었지만 알아는 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정말 기이한 추상화를 결과물로 보게 된다. 당시 함께 그림 공부를 했던 내 동생은 양손잡이였다. 그래서 왼손으로 그리기는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었지만 ‘안 보고 그리기’의 마의 장벽은 녀석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림의 형태가 삐뚤빼툴하고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학생들 사이에서 그림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제법 그럴듯한, 꽤나 괜찮은 드로잉을 뽑아내는 자들도 있다. 여전히 형태는 알아볼 수 없지만 그림 안에서 생생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드로잉을 해내는 자들인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언가 말로는 표현 못하지만 그 안에 어떤 균형과 힘,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그림은 시선을 고정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전율시킨다.

전율한다는 것은 영혼이 감응한다는 뜻이다.



BRUNCH COVER 8.jpg


왼손 드로잉


조금 더 편안하게 살고 싶다.

조금 더 헐렁하게 살고 싶다.

꽈아악 움켜쥐었던 주먹을 펴고

솔솔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헐렁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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