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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Dec 21. 2023

바흐의 선율에 젖은 날에는

사진: 20231215 예술의 전당 라이브 공연, Stage+(도이치 그라모폰)


임윤찬 신드롬이 거세다. 요즘 가장 핫한 피아니스트들은 누굴까?


우리나라에서는 임윤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반 클라이번 콩쿨"을 18살의 나이로 석권한 후로 그의 티켓 파워는 아이돌 콘서트를 무색하게 한다. 특히 여성들의 팬덤이 대단하다. 월드 클래스는 조성진이다.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콩쿨을 우승한 그다. 상의 무게감에 있어서는 조성진이 한 수 위라고 하겠다. 역대 쇼팽 콩쿨의 우승자 이름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마우리치오 폴리니, 크리스티안 침머만. 쟁쟁하다. 중국계 피아니스트로는 랑랑과 유자왕이 있다. 랑랑은 피아니스트계의 현우진, 일타강사다. 그의 연주는 마치 미슐랭 쓰리 스타 급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참치 한 조각을 먹는 느낌이다.  테크닉, 표현력, 섬세함, 청중을 휘어잡는 스킬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이 매끈하고 기름지다. 유자왕은 헐벗은 패션으로 유명하다. 매번 등이 훤히 보이는 홀터넥과 초미니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마케팅 전략이라는 게 뻔히 보이지만,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실력만큼은 수준급이니까.   


아이슬란드의 글렌 굴드, 비킹구르 올라프손


그러나 나는 이들 어느 누구도 아닌, 북구의 한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먼저 눈이 간다. 비킹구르 올라프손(Vikingur Olafsson)이다.


흔한 콩쿨 우승 경력도 없는, 무대매너도 밋밋한 피아니스트. 바다를 주름잡던 바이킹들이, 애니 겨울왕국의 올라프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그를 접한 건 우연히 그의 “예술과 시간(The Arts and the Hours)” 연주 영상을 통해서였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헌책에 빠져 있거나 구닥다리 장난감을 모으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나이 지긋한 덕후들의 모습이 겹친다. 보고 또 봐도, 듣고 또 들어도 반복 재생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런 그가 지난주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했다. 이 곡의 명연주로는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1981년 녹음 영상을 흔히들 꼽는다. 굴드는 단연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스페셜리스트다. 비킹구르에게 아이슬란드의 글렌 굴드라는 별칭이 붙고 있으니 그로서는 영광이겠다.


“괴델, 에셔, 바흐“와 골드베르크 30번


이런 책이 있다.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벽돌 책이다. 더글라스 호프스태터가 썼고 퓰리처 상을 받았다. 상징과 언어유희로 가득 찬 두꺼운 책이다.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번역자 밖에 없지 않을까?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어려웠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도 한 몫했던 걸로 기억한다.

에셔의 그림 Relativity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괴델의 불확정성 정리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에셔의 무한루프 계단 그림과 바흐의 음악이 본질적으로 서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첫곡 아리아 이후 모습을 바꿔가며 변주곡들이 이어진다. 구조적으로 치밀한 바흐의 곡들은 에셔의 계단처럼 차곡차곡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 듣는 이를 고양시킨다. 이 곡의 피날레는 30번이다. 모든 것들이 통합되고 정리되는 한 장면이다. 그렇다고 무한상승할 수는 없다. 에셔의 그림처럼 오르막 계단은 결국 처음으로 회귀한다. 마지막곡은 “아리아 다 카포”다. 도돌이표처럼 처음 시작한 아리아로 돌아와 연주가 끝나는 것이다.


나는 30번을 들을 때면 교회 종탑의 종소리를 떠올린다.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면 그날의 노동을 끝낸 부부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서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힘차게 댕댕댕! 하며 울리는 교회의 종탑. 우리의 새벽을 깨운 종소리이자, 하루를 마감하는 종소리였다. 이날 올라프손의 30번 연주는 나의 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종소리였다.


당일 많은 청중들이 놓친 부분일 텐데, 30번을 연주하면서 올라프손은 “글렌 굴드”에게 오마주를 바쳤다. 연주를 시작하면서 오른손을 번쩍 들어 허공에 휘저은 것이다. 1981년의 굴드도 같은 장면에서 비슷한 손짓을 한다. 나는 분명 올라프손이 의도한 액션이었다고 생각한다.


올라프손, 골드베르크 변주곡 30번


당일 콘서트홀은 매진에 인산인해였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나라 청중들의 환호가 쏟아진다. 앵콜을 요청하는 청중들에게 북구의 피아니스트는 차갑게 거절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연주가 끝나고 무대 인사 중인 올라프손 (Stage+)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완벽하지만,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앵콜이 불가능한 곡이라는 것이지요. 바흐는 저 우주의 태양계 행성들을 모두 순례하는 곡을 작곡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뭔가 앵콜로 보탠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그래도 바흐가 아리아로 시작한 여행을 다시 아리아로 마무리하게 해 주었으니 우리에겐 앵콜이 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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