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치마

그림책 ㅣ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

by 핀다

나도 인플루언서!

늦깎이 수험생 친구 은영이와 오랜만에 향긋한 차 한 잔을 하고 있었다. 삼십 대 중반에도 꿈을 꾸고 있는 우리에게는 긴 수다 속에서 불쑥 꿈 조각이 하나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인플루언서! 나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친구는 눈을 반짝였다. 그 열정이면 정말 수십만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독서실에서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은영이는 하루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반면,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나는 ‘인플루언서’라는 말이 닿을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무대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니 한 사람이 가진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전 세계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압박도 있다. 벽이 무너져서 세상은 무한할 정도로 넓어졌는데 난 여전히 집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런 내 모습이 초라해 보여 극소수의 인플루언서가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세상이라고 투덜대는 것이다. 옛날에는 동네에서 내가 빵을 최고로 잘 굽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빵을 잘 굽는 사람이 아니겠냐며 어깨를 으쓱하고 기뻐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온갖 매체를 통해 나보다 빵을 잘 굽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로 눈 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상 구석구석의 모습에 손쉽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한 개인이 한없이 쪼그라들 수도 있다는 의미다.


친구는 모든 분야의 최고들만이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반론을 펼쳤다. 지금 모습 그대로의 자기의 목소리에도 힘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인공지능이 이미 높은 수준으로 진화하여 인간보다 로봇이 대부분의 일을 더 잘 해내는 시대가 곧 온다고 하지 않는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최고를 바라보고 뛴다면 우리는 분명 모두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방식으로 빵을 만들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빵을 굽는 것은 아닐 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스토리에는 그만의 색깔과 냄새가 스며 그대로 숨 쉬고 있으니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숨결의 스토리가 공존하는 이 곳에 정답도, 1등도 없다. 사람들이 내 스토리에 귀를 바짝 대고 숨결을 느낄 수만 있다면, 나도 세상 끝에 있는 한 사람에게까지 가 닿을 수 있는 ‘인플루언서’ 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끝까지 닿지 않아도 괜찮아

명수정 작가의 그림책,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는 2019 국제도서전에서 이수지 작가가 기대되는 신간으로 추천하여 처음 보게 되었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커버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수지 작가는 책을 양쪽으로 쫙 펼쳤다. 앞, 뒤 커버가 맞닿으며 빨간 치마가 쫙 펼쳐졌다.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 명수정 / 글로연


치마가 여성을 치마폭에 가두는 족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치마에, 뛰지 말고 언제나 조신하게 행동하라는, 또는 아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으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아 발끈하기도 했었고, ‘치마만 두르면 여자’라는 말에 여자를 성적인 도구로만 보는 시선이 반영된 것만 같아서 움찔대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여성해방의 상징이라는 바지를 예찬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내가 태어날 즈음에 발간된, 교복자율화 이후에 여학생들이 바지를 즐겨 입고 다니며 나무 타기, 말타기 등을 거침없이 하는 모습을 문제 삼아 여성을 되찾기 위해 치마를 입자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지금 보면 우스꽝스러운 신문기사마저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마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렇다. 특히 봉긋한 한복 치마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쁘다. 나는 어렸을 적 시내의 웨딩거리의 한쪽 길에 죽 늘어선 한복집의 치마들을 마치 쇼윈도 속 명품가방을 보듯이 갈 길을 멈추고 바라보곤 했다. 이제 그 예쁜 치마를 딸아이가 명절날에 입는다. 한복 치마를 입고 계속 팽그르르르르 돌면서 어지럽다고 까르르 좋아하는 아이가 꽃 같다. 이 그림책도 명수정 작가의 조카가 던진 귀여운 질문, ‘이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내 치마는 세상 끝까지 펼쳐질 수 있을까.


내 치마를 세상 끝까지 펼쳐 보리라 주먹을 다지고 애써봐도 겨우 내 주변에서 핑그르르 돌다 멈추는 치마에 자주 의기소침했었다. 나의 구겨진 마음에 그림책 속 꿀벌, 개구리, 꽃송이, 무당벌레, 새, 개미, 부엉이, 호랑이, 오리, 물고기가 차례로 앉는다. 그들의 치마가 꽃향기, 종소리, 노래, 물결로 멀리멀리 퍼질 때 나의 구겨졌던 마음도 꽃처럼 핀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달은 “달아 달아,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라는 질문에 “아니, 하지만 꽤 기분 좋은 날이야.”라고 대답하며 가만히 달빛으로 나를 감싼다. ‘아니’라는 대답이 이렇게 위로가 되는 책도 없을 것이다.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 명수정 / 글로연


아직 어린 딸에게만큼은 용기를 내서 너의 치마를 세상 끝까지 펼쳐보라고 가만히 아이의 등 뒤에 손을 얹어본다. 치마를 펼치기보다 어느새 치마에 많은 것을 품게 된 나에게는 나지막이 속삭인다.


‘혼자 세상 끝까지 닿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치마를 펼친다면 치마는 세상 끝까지 펼쳐진다고 믿어. 너 잘하고 있어.’


마지막 장면의 세상 끝까지 펼치지는 치마는 책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24명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치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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