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냄새다.' 엄마의 칼끝에서 뜨거운 밤이 하나씩 잘리기가 무섭게 동생과 나는 손에 티스푼을 하나씩 쥐고 한마디 말도 없이 빠른 속도로 알밤 속을 구석구석 파먹었다. 엄마도 그 고소하고 달콤한 밤 맛을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지금도 밤을 좋아한다. 하지만 더 이상 밤을 그렇게 쪄 먹지 않는다. 파먹는 노동을 들여서까지 먹고 싶어 하지 않는 남편과 밤을 파먹으며 절망, 성공, 위기, 환희 등 온갖 감정의 파도를 다 겪는 딸을 위해 몇십 개의 밤을 파고 있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끔, 깐 밤을 한 주먹씩 사다가 먹는다.
“아냐, 아빠! 애랑 밤 파먹으면 난리 나서 안 먹어.” 밤 좋아하는 딸이 친정에 왔다고 아빠는 산에서 알밤을 그득하게 한 포대나 따고, 주워 왔다. 미안했지만 집으로 가져가서 버리게 되는 것보다는 덜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밤을 굳이 택배로라도 부치려는 아빠를 말리며 엄마는 내가 깐 밤을 사다가 먹는다는 사실을 말했고, 그 날 저녁부터 아빠는 밤을 깎기 시작했다고 했다. 손에 여기저기 상처가 나서 피가 나도 밤 깎는 것을 멈추지를 않는다고 했다. 나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화를 냈다. 그냥 조금 사서 먹으면 되는데 왜 손을 다쳐가면서까지 하고 있느냐고, 제발 좀 말리라고.
한 달 후, 큰 지퍼팩으로 5 봉지나 되는 깎은 밤이 아이스박스에 담겨왔다. 오랜만에 욕심껏 먹어보려고 스무 알을 덜어 그릇에 담았다. 밤을 씻으려고 물을 받으려다 밤알 하나를 들어 살펴보았다. 목이 멨다. 칼이 지나간 자국들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었다. 밤을 하나하나씩 만져봤다. 아빠의 모습이 스쳐갔다. 나를 번쩍번쩍 들어 올렸던 아빠의 튼튼한 두 팔과 다리,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차 안에서 서둘러 입에 꾸역꾸역 넣었을 아빠의 도시락, 사업이 망하고 또 망해도 6전 7기 끝없는 도전 속에서 태웠을 수없이 많은 담배. 또 화가 났다. 이렇게 눈앞이 어른거려서야 이 밤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아빠는 딸들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아빠가 오글거리는 말을 못 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나는 그걸 몰랐었다. 엄마와 싸우고 나서도 화해의 손길이라고는 엄마가 좋아하는 홍시가 담긴 봉지를 툭 식탁에 올려놓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아빠가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오래 딸들의 손을 잡고, 딸들을 품 안에 꼭 안고, 딸들에게 뽀뽀하면서 멀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을, 사춘기 딸이 액자 속에 넣어둔 아이돌 사진 위에 자신의 증명사진을 붙이고는 웃었던 마음을, 딸과 함께 차 안에서 호두과자를 까먹으면서 아빠의 오랜 첫사랑 얘기를 조곤조곤 꺼냈던 마음을 이제야 읽는다. 아빠는 그렇게 딸에게 모든 아이들이 꿈꾸는 다정한 슈퍼맨 아빠가 되어주었었다. 아빠에게 진 빚은 이자까지 쳐서 더 늘어나기만 한다.
요즘 아빠의 밤은 편치 않다. 자꾸 악몽을 꾸신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밥은 잘 먹었냐는 인사 대신 아빠는 잘 잤느냐고 묻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빠의 악몽이 중년 이후에 겪는다는 무기력이나 우울감이 나타난 것은 아닌지 무섭고, ‘딸이 최고다.’라고 입버릇처럼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던 아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의 마음을 공감해줄 수 있는 아들이 없어서 외로우신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혼자서 소주 한 잔 하시면서 "인생 참 허무하다."라고 한 마디 내뱉으시거나 잡생각이 없어진다며 등이 꼬부라질 정도로 텃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오시는 날에는 맏딸인 내가 아빠의 허한 마음 구석을 돌봐드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죄책감도 든다. 얼마 전, 부모님께 드리려고 잠옷을 샀다. 겹겹이 쌓인 겉옷을 다 벗어내면, 잠옷은 맨몸을 안아 우리를 쉼과 잠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온전히 편안하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새로 산 부드러운 잠옷을 곱게 접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빠가 깎으신 밤을 넣어 밥을 지은 날에 밥을 남기면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이라 해도 어림없이 나에게 혼쭐이 난다. 아빠의 밤이다.
거센 바람에 나뭇잎과 가지는 헝클어진 머리칼처럼 금방이라도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버릴 듯 하지만 나무는 뿌리를 땅에 박고 버티고 서 있다.
<흔들린다> 함민복 시, 한상욱 그림 / 작가정신
함민복의 시에 한성옥이 그림을 그린 시 그림책, ‘흔들린다’를 보고 있으면 짠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에 천천히 숨을 고르게 된다. 함민복 시인은 형이 커다란 참죽나무의 그늘이 집에 너무 크게 든다며 가지를 쳐내는 것을 보고, 부들부들 몸통을 떠는 나무에 흔들리는 우리의 모습을 담아냈다. 거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고 최선을 다해 서 있었을 아빠. 그리고 이제 그 애타는 흔들림을 아는 엄마가 된 나. 우리는 오늘도 흔들린다.
구름이 점점 짙어지다가 천둥번개가 치고 다시 맑아지는 모습이 5장의 면지에 물들어있다. 글자가 없으면 책장을 휘리릭 넘기기 십상인데 장마다 아름다운 풍경의 모습에 한참 시선이 머무른다. 이것이 인생 이리라. 흔들리지 않기 위해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엄마 아빠에게 위로 한 조각을 선물한다.
<내 옆의 아빠> 글 그림 수쉬 SOOSH, 옮긴이 위문숙 주니어김영사
천하무적 딸바보 아빠의 모습을 담아낸 그림책, ‘내 옆에 아빠’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작가는 아빠의 딸에 대한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일상의 순간들을 따뜻하고 맑은 수채로 담아냈다. 덕분에 나도 잊고 살았던 아빠와의 시간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아빠와의 시간. 퇴근 후 나를 번쩍 들어 올려 뽀뽀하면 볼이 따가웠다. 아빠 비행기, 아빠 목마는 언제나 튼튼했고, 아빠의 손을 잡으면 산도 거침없이 오를 수 있었다.
나와는 달리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은 어린 딸이 혹시 아빠와의 유대감이 없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난 둘이 함께 있는 시간에는 바쁜 사진기사가 된다. 사진이라도 남겨서 아빠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다. '네가 이렇게 작았을 때, 아빠가 네 곁에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