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나보다 더 가진 것이 많아 보이는 친구의 말을, 최고의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의 말을, 나만 모르는 진리인 듯 속삭이는 TV 속 스타의 말을. 누군가가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내 턱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값비싼 디저트나 되는 양 혀 위에 올려줬고, 난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능동적으로 내 입 속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쑤셔 넣기도 하는데, 적어도 텅 빈 내 뱃속을 들켜버릴 까 부끄러워 배를 움켜쥐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우리에게 기대되는, 그 어떤 형상을 위해 삼킨다. 삼킨 목소리가 다시 그 형상을 재 탄생시키고, 우리는 다시 굶주린다.
내가 먹어 치운 것들
'짖어봐 조지야'의 조지는 개다. 그런데 조지는 '멍멍'짖지 않고 '야옹', '꽥꽥', '꿀꿀', '음매' 엉뚱한 소리만 해댄다. 절망한 엄마는 조지를 의사 선생님에게 데려가고, 의사 선생님은 조지의 몸속에 손을 깊이 넣어 고양이, 오리, 돼지, 소를 차례로 꺼낸다.
<짖어 봐 조지야> 줄스 파이퍼 지음, 조숙은 옮김 / 보림
아이는 호들갑을 떨며 깔깔 웃었지만 나는 화들짝 놀라서 쇄골의 중앙에 얼른 오른손을 갖다 댔다. 마치 내 안의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막아 보기나 하려는 듯이. 내 안에는 무엇이, 누가 들어있는 걸까? 학교에서는 교과서에 적힌 글자들을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키기에 바빴다. 삼키자마자 증발해버려도 아무 상관없듯이 먹어 치웠다. 학교를 졸업했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쉴 새 없이 보고, 듣는다. 헛배가 부른다. '영상 중독'이라는 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경계하고 있지만 '읽기 중독, 활자중독'이라는 말은 좋은 습관인 것처럼 가볍게 웃어넘긴다. '강의 중독'이라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있다. 다른 사람에게 한 접시의 음식을 낸다고 생각해보자. 오늘도 당신은 당신 앞의 손님을 빠르게 살핀다. 전문가가 이야기해 준 대로 매력적이라 평가받는 음식들을 얼른 사다가 접시에 담는다. 그리고 당신의 요리 철학을 담은 양, 당신의 특별한 레시피를 보여주는 양 우아하게 건넨다. 당신이 만족 해하듯, 손님도 만족 해하며 먹을 것이다. 역시, 사 온 음식으로 가득 찬 접시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당신의 음식을 놓을 자리가 없다.
앵무새는 그만, 내 목소리 찾기
우리는 전시 욕구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종류의 '입력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내 것인 양 앵무새처럼 내뱉는 것이 아니라 내 목소리를 찾는 것이다. 거울을 '쨍'하고 정확히 비춰 내 속에 엉겨 붙은 수많은 타인을 떼어버리고 진정한 내 모습을 찾는 것이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좋아한다고 보이고 싶었는지도 헛갈리는 당신, 오늘도 끊임없이 읽고 보는 당신에게 '휴 입력'을 권한다. 빈 접시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보는 거다. 마음을 다해 끝까지, 그리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디뎌 보자. 화초도 심어보고, 춤을 추며 땀도 흘려보자.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깊이 내려가 당신 안의 온갖 반짝이는 찌꺼기들을 다 토해 낼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맨 얼굴을 만나자. 당신을 당신의 목소리로 채워 보자. 광고에 무차별하게 던져지는 숫자들과 무관하게 내 몸을 건강하게 가꾸고, 스무 권의 자기 계발서 대신 어떻게 살면 좋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어디를 가나 소란스러운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 지키기가 더욱 힘든 때이다. 잠시 멈춰서 내 벗은 모습을 마주하고, 내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는 타인의 사상이 몰래 성벽을 타고 올라와 나만의 성채를 침범하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 이것이 독서의 정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