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우리들의 이름

그림책 ㅣ 아니의 호수

by 핀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아니는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자기 자신마저 지겨워져 버렸다.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일 년에 한 번, 달력을 팔기 위해 찾아오는 우편배달부가 반가울 법도 하지만 고양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담긴 달력 그림이 싫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는 바람의 속삭임도 ‘어디에든지 다 있다’는 물의 중얼거림도 들리지 않는다.


키티 크라우더의 그림책 ‘아니의 호수’ 속 아니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다. 누구나 한 번쯤 어떤 이유로든 가슴속에 어둠이 가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고양이 그림이 싫은 아니의 마음은 몇 년째 시험관 시술에 실패한 여자가 아기를 어르는 엄마의 웃음이 보기 싫은 마음과 닮았고, 바람과 물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던 아니의 모습은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다른 시선으로 보기만 한다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식상한 위로에 더 슬퍼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아니의 호수> 키티 크라우더 지음, 김영미 옮김 / 논장


아니의 세 거인, 나의 비밀상자

아니는 세 개의 섬이 있는 호수에 몸을 던진다. 놀랍게도 가장 어두울 깊은 호수 속은 빛으로 환하다. 처음에는 아니가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곧 나의 모습이 겹치면서 내 안 깊숙하게 가라앉았던 비밀상자가 떠올랐다. 나는 쓰러지면 더듬더듬 내 비밀상자부터 찾는다. 내 안의 비밀상자에는 작은 별들이 담겨있다. 엄마의 따뜻한 등짝 스매싱,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가슴 벅찬 성공의 환희, 나의 모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준 한 사람의 음성, 바짝 짧게 정리하고 다시 출발선에 선 손톱 등. 상자를 열면 나만이 가진 그 별들은 날아올라 나를 다시 세상 속 유일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아니를 호수에서 건져 올리고, 드디어 집을 떠나 새로운 길로 떠날 수 있게 해 준 세 거인이 내게는 비밀상자 속 작은 별들이다. 아니가 호수에 다녀온 후로는 금빛으로 빛나는 카디건을 입고 웃고 있었던 것처럼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회복탄력성'이라고 불리는 이 힘은 사람을 살린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William Wordsworth


당신에게도 재생의 힘을 가진 시간의 점이, 비밀이, 별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혹여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뿜어내는 그것들을 반드시 찾기를 바란다. 작은 것들도 힘이 세다. 다른 수많은 것들에 가려 어느 구석에 당신의 별이 빛을 잃고 처박혀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찾으려고만 한다면 당신의 비밀은 안간힘을 쓰며 답하려 할 것이다. 당신도 금빛으로 빛나는 카디건을 입을 수 있다.




아니의 아니무스

“나한테 남성성이 너무 없대. 남성성이 어느 정도 발현이 되어야 하는데 여성성만 있대.”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고 있는 친구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그때, 이 그림책이 번쩍 떠올랐다. 사실 이 그림책 제목을 볼 때마다 ‘아니’라는 이름이 자꾸 내게 융이 말하는 아니마의 ‘아니’, 아니무스의 ‘아니’로 들리는 것이었다. 작가는 ‘아니의 호수’를 통해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녀가 선천적인 난청으로 다섯 살이 넘어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마법, 보이지 않는 것, 분명치 않은 것들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작품들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나는 근원적인 질문, 근본적인 감정을 다루는 이 그림책을 융과 라캉의 시선을 빌려 여러 차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융은 남성의 여성적 측면은 ‘아니마’, 여성의 남성적 측면을 ‘아니무스’라 부른다. 내면의 인격이 균형을 이루며 통합이 될 때 진정한 의미의 ‘자기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아니는 뼛속까지 외로웠음에도 불구하고 호수 건너 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만 할 뿐 호수 건너편으로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한다. 아니의 무의식 속 남성적인 요소, ‘아니무스’는 바깥과의 관계를 통제하는 벽에 그려진 호수 속 생물들을 통해 보여진다. 억압된 무의식은 번개, 폭풍 등으로 위협적으로 변하고 결국 아니는 호수 깊은 속으로 몸을 던진다. 아니가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니가 ‘아니무스’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아니의 ‘아니무스’가 의식과 무의식을 중재해 주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아니가 호수 깊은 곳에서 만난 세 거인이 바로 아니의 ‘아니무스’이다. (보통 여성의 꿈에 아니무스는 개인보다 집단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신화에서 에로스가 프시케를 구원하듯, 세 거인은 아니를 건져 올린다. 아니의 내면의 아니무스가 아니를 구한 것이다. 세 거인은 호수를 벗어나 마침내 바다에 도달함으로써 소년을 벗어나 성숙해지고 강해졌다. 섬은 사라졌다. 아니의 노력과 거인의 도움으로 이제 아니는 치유된 아니무스를 감싸 안는다.



무의식의 놀라운 힘이 만들어 낸 기적

자크 라캉은 우리의 정신이 자리하는 곳을 세 곳으로 나눈다. 유아와도 같은 무책임한 순수성만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환상 속 ‘상상계’, 현실의 고난을 충분히 감당하는 성인들이 사는 ‘상징계’, 현실의 어려움을 나도 몰랐던 무의식 속 놀라운 힘으로 극복하고 기적을 이룬 성숙한 사람들이 사는 ‘실재계’가 그것이다.

물고기를 잡고, 엄마가 이른 대로 겨울에 먹을 물고기를 말리고 너는 아니는 현실을 스스로 헤쳐 나갈 능력이 있는 성인이다. 하지만 억눌린 무의식 속 욕망은 끊임없이 아니를 괴롭힌다. 아니는, 세 개의 섬 주위에서 물고기가 많이 잡히지만 뭔가 께름칙하다며 근처에도 가지 않는 아랫마을 사람들처럼, 욕망의 움직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느 날 몰아치는 두려움과 불안에 숨이 막혀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던 아니. 호수의 깊은 속은 프로이트가 의식과 무의식을 빙산의 일각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처럼 아니의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가 두려움과 불안을 두 손으로 감싸고 무거운 돌을 발목에 묶은 것은 아니의 무의식 속 밑으로 밑으로 깊게 들어가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아니는 세 거인의 도움으로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나아간다. 또, 세 거인들은 아니의 도움으로 ‘상상계’에서 ‘실재계’로 이행하게 된다. 호수 속의 세 개의 섬, 거인들은 ‘상상계’에서 살고 있는 소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저주는 호수를 떠나 (엄마의 자궁과 연결된 탯줄을 끊고) 바다에 살고 있는 여자 거인들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바다로 흐르는 강이 땅 속에 존재했지만 이제 사라졌다는 말은 ‘상상계’에서 ‘실재계’로 가는 길에 역경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해 낼 수 없을 일을 해 낼 수 있도록 서로에게 용기를 준 에밀과 아니에게 사랑이 싹튼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작가는 ‘우린 이 책을 가만히 덮고 아니가 에밀과 자신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살도록 둡시다’라는 말로 이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제 우리가 각자 '자기 안의 신화'를 살아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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