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열자 메주 냄새가 훅 끼쳤다. 매캐하고 고소한 탄 냄새도 코끝을 스쳤다. 마당엔 더 이상 나란히 널어진 메주도, 연기를 한 번 뿜어내고 재를 잔뜩 물고 있던 아궁이도 없었지만. 대문의 왼편 작은 화단에는 대추나무가 죽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그것도 싱그러운 대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세상에, 넌 그대로구나.” 아빠는 대추가 열리면 갈색 반점이 있는 연둣빛 대추를 ‘똑’ 따서 옷에 한 번 쓰윽 문지르고는 사과처럼 아삭하고 달콤하니 맛있다면서 건네주곤 하셨다. 대추를 깨물었다. 시간이 멈췄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회상 장면처럼 그 옛날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엄마가 얇은 돈가스를 튀기자마자 가장자리를 호호 불며 냉큼 집어먹고는 엄지 손가락을 번쩍 들어 올린다. 동생과 나는 아빠처럼 계산기를 똑똑 두드리고 숫자를 빈 종이에 적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전화놀이를 한다. 마당으로 간다. 주인집 할아버지가 작은 내 손에 다리 다친 작은 아기 참새를 가만히 놓아주니 따뜻하고 말랑한 온기가 손에 스며든다. 학교 앞에서 100원 주고 산 노랑 병아리가 도망가버렸다는 엄마의 무심한 말에 난 몇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다. 담벼락이 거칠다. 개구리알이 올챙이로 깨어나고 뒷다리, 앞다리가 튀어나오고 꼬리가 들어가는 모습을 오후 내내 보곤 했던 나는 개구리가 되어 펄쩍 뛰어가버린 씰룩이를 부르며 화단을 뒤진다. 집 밖으로 나선다. 바람에 쓰러진 토란대를 주워 우산 삼아 빗 속을 뛴다. 마주오는 사람이 있으면 살짝 비켜서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에 사는 혜정이네 집에 놀러 가 혜정이 삼촌의 오래된 우표를 구경한다. 집으로 돌아온다. 겨울에는 옥상에 서서 지나가는 차 위에 눈송이를 던진다. 여름에는 평상 위에서 닭죽을 배 터지게 먹고 오래오래 별자리를 찾다가 그대로 잠이 든다.
내가 잃어버린 것 3가지
난 왜 어릴 적에 살았던 빨간 지붕 이층 집을 찾아갔을까. 오래 그리워하던 그곳에 가서 무엇을 찾고 싶었던 걸까. 그때 당시 나는 안갯속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지만, 이 길이 맞는지 저 길이 맞는지 몰라 마음만 조급한 채로 헤매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잃어버린 3가지를 찾으러 갔던 것 같다. 나의 자리, 나의 시간, 그리고 나의 영혼. 그 3가지만큼은 분명했던 시절이 기록된 그곳에 가야만 했다.
나의 자리
취직에 실패한 친구는 여의도 빌딩 숲 속에서 하늘에 맞닿은 수십 개의 빌딩의 수십만 개의 창문을 바라보며, 저렇게 많은 자리 중에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고 했었다. 나는 뒤늦게 내 자리를 잃고 헤맸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한 확실한 자리 하나 마련된 것 같지 않았다. 한 눈이라도 파는 날에는 지금까지 달려서 서게 된 실체 없는 자리조차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삽으로 구덩이라도 파서 푹 파인 물리적인 공간을 직접 손으로 만지며 ‘여기 내 자리’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보이지 않는 계단을 계속 오르는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나의 자리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시절, 내가 앉아있었던 그 공간에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겠는 내 다리를 잠시 뉘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시간
나의 모든 시간은 미래를 위해 투자되었다. 늘 준비하고 대비하는 시간이었다. 조금 더 성공 가능성이 있는 것을 취사선택하여 시간을 쏟아부었다. 물론,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조언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관광지를 찍으며 여행하듯, 숙제하듯, 휴식의 시간을 마련했다. 시간이 가장 비싼 것이니 시간을 아끼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부자의 조언을 감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준비와 투자라는 이름으로 나의 시간은 빈곤해져 갔다. 언젠가 밤늦게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는 남편에게 피곤하다면서 왜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느냐고 차라리 그 시간에 자라고 한 적이 있다. 남편은 슬픈 눈으로 말했다. “그럼 내 시간이 아예 없어. 이 한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한 내 시간, 내 낙이야."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많다. 현재를 늘 미래를 준비하는데 쏟아버리는 사람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도 쓰기 어려운 사람도, 시간을 잃어버린 것은 마찬가지다.
나의 영혼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조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 위에 이것저것 붙이느라 풀칠을 하도 해대서 눈앞이 뿌옇게 된 지경이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생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몰랐다. 10대도 아니고 곧 30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누구인지를 찾고 있다니 당황스러웠다. 놀랍게도 나와 닮은 얼굴들은 제법 많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영혼들의 울부짖음은 우울증, 공황장애, 화병이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음소거 기능을 하는 몇 개의 알약으로 잊혀졌다.
올가 토카르축이 글을 쓰고,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그린 ‘잃어버린 영혼’은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사람, 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영혼을 잃어버리고 눈 덮인 겨울 숲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얀은 어느 날 밤 자다가 깨서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는 물론 자기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는 지경이 되어 의사를 찾아간다.
<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축 글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의사는 얀이 영혼을 잃어버렸다며 자기만의 장소에서 영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처방을 내린다. 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영혼을 기다린다. 수염이 허리에 닿을 만큼 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안, 기다림의 공간에는 빛이 스며든다. 드디어 얀은 지치고, 더럽고, 할퀴어진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영혼을 만난다. 초록으로 뒤덮여 생명력을 되찾은 곳에서 얀과 얀의 영혼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빈티지한 느낌을 주는 회계장부의 모눈종이와 10mm 심을 두 개 넣은 샤프의 얇은 선, 흑연의 질감은 초현실적이면서도 회상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영혼의 이야기에 귀를 가까이 대고 듣게 한다. 나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느리게 움직이는 영혼을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무언인가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는 법을 잊었다. 하지만 수학 공책의 모눈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면, 얀처럼 “그만.”이라고 외쳐야 할 때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있는 어른들, 또는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어른들을 향해, 이 책은 정지신호를 번쩍 들어 멈추게 한다.
<모모>에 나오는 ‘카시오페이아’라는 이름을 가진 거북은 모모가 갈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좀 빨리 가게 거북이를 안고 가면 어떻겠냐는 모모의 제안에 거북은 이렇게 대답한다. “미안하지만 안 돼.” 왜 꼭 직접 기어가려고 하냐는 모모의 물음에 거북은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한다. “길은 내 안에 있어.” 거북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모모는 거북을 따라갔다.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