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코트

그림책 ㅣ 고슴도치 엑스

by 핀다

“야, 촌스럽게 굴지 마. 무조건 나와. 알았지?” 끈질긴 친구였다. 나는 옷장을 뒤적였다. ‘더블데이트’ 라는데 평소처럼 검은 티에, 청바지에, 검은 코트에, 검은 구두를 신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입지 않고 모셔만 두었던 파랑 체크무늬 코트를 집어 들었다. 마치 쨍한 파랑이 명랑하지 않은 나를, 톡톡 튀는 개성 대신 잔잔한 취향을 가진 나를 감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요즘 남자들 여성스러운 애들 재미없다고 안 좋아해. 너도 그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 좀 잘라 봐.” 난 딱히 남자를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친구의 말을 한 번 더 떠올리며 파랑 코트를 걸쳤다. 또각또각.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지만 골목상가에서 쏟아지는 불빛으로 술집 앞에 서 있는 셋을 볼 수 있었다. 내 친구와 남자 A는 각각 동성친구를 한 명씩 데려온 것이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벌써 셋은 친해진 듯했다. 내 상대 남자 B는 식빵 속살 같은 하얀 얼굴에 눈이 동그랗고, 까맣고 짧은 머리칼이 잘 정돈된, 전체적으로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톤이 제법 높은 목소리로 경쾌하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자꾸 입술을 말아 넣었다.


식탁의 가운데에는 생선탕이 바글바글 끓었고, 소주잔이 채워졌다. 난 소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았다. 오늘따라 전염병이 한바탕 돈 병실에 소독 알코올을 붓는 느낌이었다. 셋은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흥이 더해져 목소리가 커지고 웃음이 늘었다.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탕 속의 생선뼈를 하나 건져서 앞접시에 놓고, 살을 바르고 있었다. 내가 생선살을 입에 넣었는지 넣지 않았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난데없이 날아든 질문에 놀라 젓가락질을 멈추었다는 걸 기억할 뿐이다.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예요?” 나의 대답이 너무 늦자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를 말하기 시작했다. 가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공감의 박수를 치고, 한 소절 노래를 부르고, 떠들썩하게 그 가수의 콘서트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나를 넘어가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는데 친구가 다시 묻는다. “넌?” 순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을 말할지 그냥 인기가수 중 아무나 댈지 고민을 했다. 딱히 말하기 좋은 근사한 인기가수가 생각이 나질 않아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김동률...” 순식간에 셋은 조용해졌다. 정적을 깨며 작은 목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어… 나는 좀 우울하던데.” “…. 나도.” “나도 별로…” 그냥 정말 아무나 말할 걸.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것도 생각뿐, 난 땀까지 삐질대며 자리를 지켰다.


술집을 나오면서 친구는 이것도 인연이고, 추억인데 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도망가고 싶었다. 난 친구에게 질질 끌려 마지못해 B옆에 섰다. 턱을 내려 셀카 각도를 유지하고 눈을 크게 떴다. 쿨해 보이도록 살짝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는 파랑 코트를 연신 문질렀다.


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웃음이 묻어 있는 파랑 코트를 버렸다.




고슴도치 엑스는 누구도 가시를 세우지 않는 안전하고 세련된 도시 '올'에 살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청소를 하던 엑스는 금서를 발견한다. 뾰족한 가시로 빛났던 영웅의 이야기! 고슴도치는 그 날부터 자신의 가시를 뾰족하고 강하게 만드는 훈련을 시작한다. 고슴도치만의 개성이 담긴 가시를 마침내 세운다.


<고슴도치 x> 노인경 글 그림 / 문학동네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20대에는 ‘인기녀가 되는 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옷 입는 법, 말하는 법, 웃는 법, 밀당하는 법, 시선 처리까지 법칙은 끝도 없었다. 한 마디로 이성이 좋아할 만한, 이성에게 먹히는 외모, 스타일, 성격, 조건에 가까워지기 위해 ‘수정’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슴도치가 매일 ‘가시부드럽게비누’로 거품 목욕을 하고 가시를 불린 후, 충분히 빗질하여 차분하고 부드러운 가시를 만들지 않으면 순식간에 품위 없고, 위험한 생명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이제 그런 법칙 따위 집어던질 수 있으니 좋겠다 싶었다. 착각이었다. 오히려 법칙들은 늘어났다. ‘예쁘고 현명한 아내 되기’ ‘좋은 엄마 되기’ ‘센스 있는 며느리 되기’ 설상가상으로 이 수많은 법칙들은 서로 충돌까지 하는데,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고슴도치가 가시를 날카롭게 바짝 세우고 ‘뚫어! 뚫어! 다 뚫어!’라고 외치며 나무판자며 돌이며 모조리 뚫어버릴 때는 어찌나 통쾌하고 시원하든지 내 막힌 속마저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고유한 특성이 사회가 인정하고 부과하는 역할놀이에 딱 맞지 않다고 해서 캐스팅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고슴도치는 가시가 있어 고슴도치다. 뾰족하게 서 있는 가시가 흉하다고 하니 그 가시를 물먹은 실오라기처럼 만들기 위해 인생을 바칠 순 없다. 그 뾰족한 가시로 남을 찌르라는 것이 아니다. 고슴도치가 발견한 책에서도 나왔듯이, 뾰족한 가시가 있어서 내가 빛날 수도 있는 세상이다. 가시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내 뾰족한 가시로 어떤 인생을 살지 생각하자.


작가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알아가고, 찾아가고, 격려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른에게도 스스로의 팬이 될 기회는 필요하다. 이제 나의 취향이 세상의 멋지고 세련된 기준에 못 미치더라도, 나의 외모나 성격이 여우같이 매력적인 여자나 착하고 우아한 엄마에 맞지 않더라도, 나를 부끄러워하거나 뜯어고치려 하지 않겠다. “요호! 나는 고슴도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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