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유난히 엄지발톱이 크다. 한 번도 내 발톱을 다른 사람의 발톱과 비교해 유심히 들여 다 본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었다. 새끼발톱의 6배도 더 넘는 크기의 엄지발톱에 대한 민망함은 17살 추석 명절날 할머니 댁에서 시작되었다. 저녁밥을 잘 먹고 식구들 모두 둥그렇게 앉아 윷놀이를 할 참이었다. 동갑내기 사촌언니가 갑자기 머리를 ‘훅’ 앞으로 숙이더니 다시 ‘홱’ 뒤로 젖히고는 정말 족히 15분은 넘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유를 묻자 웃느라 말 한마디 못하고, 한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의 손가락으로 내 발톱을 가리켰다. “너 엄지발가락이 왜 이렇게 커?!” 어른들의 다문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들은 너도 나도 발을 꺼내 서로 발톱 크기를 견주어 봤다. 난 슬그머니 두 발을 감추고 다리에 힘을 꼭 주었다. 그 커다란 두 개의 발톱에 장난스럽게 툭 꽃을 놓아준 것이 친구들이었다.
까만색 학생 스타킹은 그리 얇지 않은데도 내 큰 엄지발톱 위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야, 니 스타킹 또 터졌어. 별명 바꾸자. 발톱으로.” 그 뒤, 한동안 내 별명은 발톱이었다. 뒤집어 신고, 구멍을 발가락 사이에 감추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그러다 귀찮아져서 구멍 부분의 살을 네임펜으로 까맣게 메꾸기도 했다. 어느 날, 무엇을 잘못해서 은영이와 교무실에 불려 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고개를 조아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는데 은영이가 난데없이 김밥 옆구리 터지듯 풉풉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선생님도 화를 못 내시고 눈만 뻐끔뻐끔하셨고, 나도 눈동자만 휘둥그레져서 ‘이거 난리 났구나.’ 하며 고개를 숙인 채 은영이를 봤다. 잠시 뒤 무슨 일이냐는 선생님 말씀에 은영이는 손으로 입을 막고 어깨를 들썩 들썩이며 손가락으로 내 발끝을 가리켰다. 결국 선생님도 나한테 미안해하시며 웃음을 참지 못하셨고, 은영이는 그대로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은영이와 나는 서로 밀치며, 웃으며, 교실로 돌아갔다. 그냥 놔뒀다. 양 발끝 위에 하얗게 뻥 핀 두 송이 꽃을.
내 친구는 4998명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4998 친구’ 속 주인공 남자아이는 친구가 4998명이나 된다. 아이는 그중에 3878명은 만난 적도 없고, 도와 달라고 했을 때 손길을 내민 친구는 38명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정작 집에 온 친구는 딱 한 명뿐이었다고.
<4998 친구> 다비드 칼리 글 고치미 그림, 나선희 옮김 / 책빛
이미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하게 들어온 sns의 100명, 1000명을 넘어가는 팔로워에 친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sns가 일상화되기도 훨씬 전인 15년 전, 친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졌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친구가 몇 명이냐고 물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학교 친구가 전부였지만 짐작하여 세어보고는 30명쯤 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중에서 진짜 친구는 몇 명이냐고. 진짜, 가짜 친구가 어디 있느냐고 어리둥절해하며 진짜 친구는 친한 친구를 말하겠지 하고 단짝 친구로 다섯 명 정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친구가 한 명이 있었고, 지금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뭐 하나 모자람 없이 멋진 그에게 친구가 한 명도 없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친구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야 세월 속에 우정의 의미가 퇴색해가는 것을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그가 진짜 친구를 언급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십 대에 불치병을 얻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누워지내며 친구에 대해, 우정이란 감정에 대해 곱씹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병원과 한의원을 모조리 돌아다니며 의사의 발목을 잡고 도와 달라며 울부짖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씩 떠났던 것이다. 종종 그의 집을 찾아왔던 하나 남은 친구마저 발길을 끊고 떠나던 날, 그는 혼자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친구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고 했다. 그의 고통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친구들은 타인이었다. 친구들은 공부를 해야 했고, 함께 몸을 부딪치며 놀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영원한 우정, 언제 어디서나 의리! 누가 봐도 불행의 늪에 빠진 친구의 곁에 끝까지 있어주어야 그게 우정이고 의리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정으로 맺어진 현실 속 두 사람 사이의 경계는 얼마큼 지워질 수 있을까.
단단한 두꺼비집
이제는 안다.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돈을 모아 평생 같이 살자고 했던, 진하다면 진한 나와 내 친구들의 우정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의 거친 폭풍우 속에 힘없이 깨져버리는 유릿장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더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난 친구가 되는 일이 두꺼비집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손 위에 물에 젖은 모래를 올리고 올려 토닥이기를 수십 번을 하고 나면 두꺼비집이 단단해져 손을 빼도 무너지지 않는다. 다시 손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손을 뺐을 때 손과 함께 스러지는 두꺼비집도 있다. 살다 보면 급히 혼자 가야 할 일도 있다. 친구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단단한 두꺼비집이라면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기다리는 것뿐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가게> 후쿠자와 유미코 글 그림, 엄기원 옮김 / 한림출판사
큰 곰과 겨울잠 쥐는 '겨울을 준비하는 가게'로 쇼핑을 하러 간다. 작은 겨울잠 쥐는 커다란 스웨터를 보고 친구 곰에게 선물하고 싶어 하고, 곰은 조그마한 빨간 조끼를 겨울잠 쥐에게 선물하고 싶어 한다. 가격은 각각 도토리 500개, 50개! 가을이 끝나갈 무렵까지 열심히 도토리를 주운 곰과 겨울잠 쥐는 드디어 가게로 가지만 '품절,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만 붙어있다. 크게 실망한 둘 앞에 가게 주인인 다람쥐 부부가 나타나 선물 꾸러미 두 개를 보여준다. 늦어도 곰과 겨울잠 쥐가 꼭 사러 올 테니 팔지 말아 달라고 친구들이 부탁했던 것이다. 따뜻하다.
<WE FOUND A HAT> JON KLASSEN / WALKER BOOKS
거북이 두 마리는 어느 날 모자 하나를 발견한다. 모자는 둘에게 모두 어울리지만 모자는 하나뿐이다. 커다란 모자를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거북이의 모습과 모자를 포기할 수 없는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는 거북이의 눈동자를 보고 웃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하나밖에 없는 모자를 독차지할 기회가 있었지만 친구가 둘이 모두 똑같이 모자를 쓰고 있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하자 귀여운 거북이는 모자를 가지러 가려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그냥 친구 옆에 붙어 누워 잠을 청한다. 존 클라센은 천재다.
<THE STORY OF FISH & SNAIL> Daborah Freedman / VIKING
책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와 달팽이의 이야기다. 어느 날, 물고기는 해적선이 있고, 보물이 숨겨져 있는 대단한 새 책을 발견했다면서 같이 가자고 하지만 익숙한 자리에서 고양이인 척하며 놀고 싶은 달팽이는 싫다고 한다. 그런 지루한 일은 그만두고 같이 가자는 물고기의 말에 발끈하여 달팽이는 가버리라고 소리 지르고 물고기는 정말 혼자 간다. 물고기가 옮겨 간 새 책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물고기의 모습을 언뜻 본 달팽이는 몸을 던진다! 서로 다른 친구를 만나 때로는 충돌이 있기도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용기를 얻기도 한다. 두려움을 떨치고 새로운 바다에 몸을 던질 용기를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친구는 소중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의 생이 이렇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조금이나마 반짝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