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에 다시 휘파람을 불었던 이유

그림책 ㅣ 새가 되고 싶은 날

by 핀다

입술을 가만 모은다. 어른들을 따라 작은 입을 오물거리다가 투덜대며 그만두었던 휘파람을 열여섯에 다시 불어 본다. 입술을 이리저리 씰룩대 보지만 주전자 콧김 소리만 날 뿐이다. 그래도 운동장 한편 계단에 앉아 다섯 살 아이처럼 눈썹까지 치켜든 채 산토끼를 불러보려던 것은 내 옆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산토끼를 한 곡 멋지게 뽑는 한 아이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긴장과 설렘과 치기가 범벅이 되어 떠들썩했던 새 학기 첫날이었다. 그 아이는 친구 한 명과 교실 뒤편 사물함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한쪽 팔을 고이고 하늘빛 싱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숨을 멈춘 나를 보고는 길쭉한 팔을 번쩍 들어 올려 안녕! 했다.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스쳤다. 귤껍질 냄새가 맴돌았다. 코끝을 비비며 서둘러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교정에 아카시아 꽃잎이 마구 떨어지던 봄, 학부모 상담 날이었다. 그 아이는 아빠를, 나는 엄마를 기다렸다. 우리 둘은 달리기 시합을 했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마주 보고 웃었다.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무릎을 잡은 두 손에도 들렸다.


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달리고, 넘었다. 그 아이의 세계에는 애초에 선이 없어 내가 나의 굵고 진한 선을 때때로 넘게 해 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가벼움이 좋았다. 날렵한 몸으로 달리며 바람에 웃음소리를 뿌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퍽퍽 맞는 게 싫어 운동을 그만두었다며 잠시 손가락을 이마에 댔다가 뗐다. 시험시간에는 omr카드를 꼭 한 장을 더 받았다. 두 장을 하트 모양으로 색을 칠해, 한 장은 제출하고, 다른 한 장은 윙크를 하며 나를 줬다. 우리는 다섯 살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술래잡기를 하고, 헉헉대며 배드민턴을 치고, 수업 시간에 쪽지를 몰래 주고받았다.


그 아이는 오토바이 탈 때 조심하라는 내 잔소리에 대답 대신 담배를 들었다. 담배연기로 만든 동글동글한 도넛 사이로 씽긋 웃기만 했다. 내가 연기를 휘저으며 기침하자 서둘러 담배를 껐다. 나는 그 아이의 친구들처럼 입에 담배를 꽂을 수 없었고, 그 아이도 잘 알았다. 허리가 꺾인 꽁초를 잠깐 바라봤다.


그 아이가 춤추던 날, 거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러 차례 허물을 벗어도 입을 옷이 없었다. 한쪽이 내 몸통만 한 통바지는 까만색 작은 학생 구두를 다 가려버렸다. 헐떡거리는 로퍼를 신었다. 자꾸 밟히는 바지 뒷 끝자락이 시커멓게 되는 것이 신경 쓰였다. 나는 바지를 질질 끌며 버스에 올라탔다. 비니, 문신, 속눈썹, 찢어진 옷, 여기저기 달린 귀걸이들. 직행버스는 도둑맞은 사탕가게 같았다. 웨이브를 하며 넘실대는 두 팔 위로, 종이처럼 접히는 허리 위로 과자가 바삭거리고, 욕설이 튀어나오고, 박수와 환호성 그리고 웃음이 뿜어졌다. 그렇게 색색깔의 사탕들은 모두 버스 안을 경쾌하게 굴러다녔다. 나는 그 친구들처럼 무대에 오를 수도 없었고, 이미 높이 쌓여버린 선물더미 위에 꽃 한 송이를 더 놓기도 싫었다. 그 아이는 왔었냐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미 바지 뒷 끝자락은 실오라기가 다 뜯어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나와 그 아이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달갑게 여긴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가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지원서를 넣는 게 왜 나한테 중요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엄마는 내가 과외를 해 주겠다고 집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자 닫힌 방문 밖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 아이의 친구들도, 내 친구들도 왜 같이 어울리냐며, 잠깐 데리고 노는 것이냐며, 아무 말이나 웃음을 실어 내뱉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기타 치는 아빠와 함께 노래하며 나그네처럼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아이가 늘 그려줬던 얼굴. 웃고 있지만 커다란 눈물방울이 달린 그 얼굴을 아직도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얼굴이 나를 바라봤다.


5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 짧은 살구색 머리에 어깨를 들썩이며 가벼이 걷는 뒷모습을 보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었다.




널 위해서 뭐든 될 수 있어.

소개팅 자리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나를 따라 하는지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마음이 있는 상대가 취미가 음악 감상이라고 하는데 “전 음악 듣는 건 지루해요.”라고 말할 리가 없다. 상대가 좋으면 특별한 인연을 만난 듯 박수라도 칠 만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자연히 손톱만큼 비슷한 점들도 샅샅이 발견되어 꺼내 진다. 심지어 마음이 가는 상대를 만나면 몸짓과 표정도 따라 한다고 한다. 턱을 만지면 자연스레 똑같이 턱을 만진다는 것이다. 여기 새를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아예 스스로 새가 된 소년이 있다.


20191117_170315.jpg <새가 되고 싶은 날> 인그리드 샤베르, 라울 니에토 구리디 김현균 옮김 / 비룡소


학교에 간 첫날, 소년은 사랑에 빠진다. 소년의 첫사랑은 새를 사랑하는 소녀다. 소녀가 소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소년은 새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깃털 옷을 입은 소년을 친구들이 놀려도 옷을 벗지 않는다. 스케치처럼 색채 없이 간결하고 다소 거친 듯한 드로잉은 서툴고 풋풋한 첫사랑의 느낌을 더 섬세하게 전해준다. 우리도 사랑하는 그의,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옷을 입는다. 군살은 감추고 라인을 살려줄 마법 같은 옷을 뒤적일 뿐만 아니라 조금 모자라거나 상대방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조건은 살짝 감추고,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 장점은 부지런히 문질러 광을 낸다. 나와 책방 데이트를 하곤 했던 남편이 서점에만 가면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애써 꾸미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단단해지는 것이다. 끊임없이 착한 척, 아름다운 척, 대단한 척해야 하는 사이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서로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어야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오래 볼 수 있다. 어느 날, 깃털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소년을 마주한 소녀는 소년의 깃털 옷을 벗겨주고, 소년의 모습 그대로를 꼭 안아준다.


몇 달 전이었다. 딸이 30분이 넘도록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고 있길래, 그림 그리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고 왜 좋으냐고 물었다. 딸의 대답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잘 그리면 좋아하잖아.” 혹시나 엄마의 칭찬이 매번 아이의 행동을 이끌어, 결국에는 내적 동기를 해치게 될까 봐 경계하며 제대로 칭찬하기 위해 공을 들였었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엄마의 기쁜 표정으로, 그림을 벽에 거는 엄마의 흐뭇한 손길로 아이는 이미 칭찬 샤워를 받았던 것이다. 엄마를 위해 새가 되려는 아이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그림을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엄마는 있는 그대로의 널 사랑한다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기쁘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엄마 사랑을 얻기 위해 무엇도 할 필요가 없다고.


누군가를 위해 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예쁘다. 하지만 내가 꼭 새가 되어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슬프지만 곧 이른 이별에 다다를 것이다.

keyword
이전 05화혼자서도 씩씩해요.